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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etc.

공연단상1. 「대학살의 신」외


1. 이 혼돈이 균형이다, 연극「대학살의 신」

2012년 1월 1(일오후 2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한태숙  원작 야스미나 레자
배역 박지일, 이대연, 서주희, 이연규


학살당한 것은 이야기뿐이다. 사회인답게 애들 싸움질의 뒷수습에 나선 두 부부, 그리고 무례, 시비, 언쟁, 몸싸움……. 이 극에서 번듯한 서사를 찾기보다는, 차라리 폴락 류의 이미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겠다. 형식을 잃은 말들이 톡톡 튀길때, 단정한 두 부부는 조금씩 망가진다. 


이 혼란이 극을 난장판이라는 자리에 붙들어 놓는다. 빠른 대사가 주제를, 겨냥점을, 온도를 계속 바꿔가며 서로를 오간다. 이 기막힌 타이밍과 앙상블이 극의 진짜 관전 포인트다. 핸드폰에서 아프리카로, 다시 술주정으로, 안 좋은 속, 버린 햄스터, 약, 백합, 가방으로 전환. 계속해서 발화되는 혼돈이, 극을 수 군데에서 잡아당겨 균형을 만든다. 어느 한 인물도 무너지지 않아 긴장이 주저앉을 겨를이 없다.
 

제목이나 대화에 등장한 학살을 키워드로, '위선의 현대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 '이기적·폭력적인 인간 본성의 통렬한 노출'과 같은 평이 대부분이다. 굳이 그런 식으로 메시지를 헤집어 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누구에게나 '제기랄의 하루'는 있지 않겠나. 이해불능형, 어긋남의 인물들을 한데 모아놓고, 완벽에 가깝게 세팅해 놓은 싸움구경에 신나게 박수치는 것으로도 족하다.
 

※ 영화 「Carnage」(2011): 감독(로만 폴란스키)과 배우(케이트 윈슬렛, 크리스토프 왈츠, 조디 포스터, 존 C. 레일리)가 고루 좋다. '혹시 모를' 국내 개봉을 기대해보자.



2. 오직 드라마만을 위한, 뮤지컬「겨울연가」

2012
년 1월 14(토오후 7시
명보아트홀 하람홀
예술감독 윤석호 연출 유희성
배역 김승회, 최수진, 전재홍, 황형석



가감加減법은 현명한 개작의 필요조건이다. 뮤지컬 「겨울연가」의 수렴 값은 유감스럽게도 오답에 가깝다. 극은 원작을 고스란히 오려붙이려다 감정의 흐름을 놓친 듯한, 드라마 명장면의 조심성 없는 콜라주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My Memory’등 드라마 OST를 기반으로 한 넘버의 멜로디가 귀에 잘 들린다. 솔로곡은 익숙하고, 중창은 화음 구성이 좋다. 이렇게 안정된 음악에도 불구하고, 극은 감정선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 

초반부는 소소한 추억을 표현하며 곡 대신 슬로모션이나 마임 등을 활용했다. 그런데 작전이 썩 들어맞지는 않은 듯하다. 기억을 바득하게 바깥으로 끌어냈을 때의 괴리감 때문인지, 사건이 너무도 가까이에서 현현하는 소극장 무대 위의 추억담은 유치에 가깝다. 중후반은 이별과 재회, 상실과 포기 등 복잡한 이야기가 발 빠르게 전개되어 급박하고, 연결고리는 자꾸 비끄러진다. 좋은 음악, 좋은 배우가 극을 쫓아가느라 벅차다.


일본 공연 당시 사진을 보면 대극장 공연으로 만들어진 듯한데, 전반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도대체 단출한 세트를 보강할 극적 매력은 어디에 둔 것일까 궁금함만 남긴 채, 뮤지컬은 드라마 「겨울연가」의 향수를 위해 오롯이 헌납돼버렸다.



3.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연극「돈키호테」

2012년 1월 15(일오후 3

명동예술극장
연출 양정웅  원작 세르반테스·빅토리앵 사르두
배역 이순재, 박용수 


맞다. 돈키호테는 이런 내용이었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거나 죄수들을 죄다 풀어주는 기행가, 산초를 옆에 두고 작달만한 로시난테를 탄 갑옷입은 노장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보니, 두 연인을 잊고 있었다. 특히 돈키호테와 둘시네아의 내면을 아주 깊이까지 파 내려간 뮤지컬 
 Man of La Mancha  각색은 얼마나 훌륭했는가. 잊을 만 했다. 이 작품의 아슬아슬한 지점은 어쩌면,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 얻은 것은 무엇인가'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무대는 세련됐다.
 음악을 아주 적극적으로 집어넣어, 퍼커션과 기타소리가 분위기를 잘 잡아준다. 마을사람들의 춤, 루신다를 향한 구애, 도적들의 반동이나 풍차 돌격 장면은 동적인 아이디어로 꾸며졌다. 딕션이 아쉽지만 돈키호테의 늙은 목소리는 역과 잘 맞고, 배우들의 언어 구사는 깔끔하다. 그 속에서 얽어진 연인들은 유쾌하게 제자리를 찾는다.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도 이 정통 무대가 혹 지루하다면, 미친 영감 돈키호테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것이 이유이지 않을까. 풍자도, 코미디도 약하다. 만약 그 목표지점이 꿈이었다면, 인물들의 그물이 겹쳐진 속에서 돈키호테만의 저돌적 희망은 잘 들리지 않는다.
 'The Impossible Dream'을 부르지 않는 돈키호테의 믿음은 네거리에 앉아있는 고고와 디디만큼이나 의뭉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