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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몇 가지 실패담: 소설 『김 박사는 누구인가?』 김박사는누구인가이기호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13년) 상세보기 “안녕하세요, 저는 천구백팔십팔 년 팔월 이십오 일 태어난 ‘백수향’이라고 합니다. 칠 년 간 대학을 다녔고, 십 학기를 등록했으며, 휴학 두 번, 이천십삼 년 팔월 이십구 일자로 졸업합니다. 혈액형은 O형이고, 무남 이녀 중 차녀, 몸무게는 오십삼 킬로그램이구요. 지금 소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얘기 좀 하려는데, 근데 저기요, 혹시… 저 아세요?” 나는 누구인가. 이제는 당신도 알고 있을 몇 가지 표면적 사실들과,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 나조차도 알지 못할 심연의 무엇으로 이루어진 나. 우리는 누군가의 정면을 보기 위해 늘 저 세 가지 범주 어딘가에서 고민하지만,.. 더보기
독서단상3. 『장국영이 죽었다고?』 외 1. 하드보일드와 가까워지는 짧은 순간, 『장국영이 죽었다고?』 장국영이죽었다고?김경욱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05년) 상세보기 아마 이 소설집에서 그런대로 가장 경쾌한 부분은, '검은 정장을 입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소리 없이 매표소 앞에 집결했다가', '아무일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일 듯 하다. 웃길래야 웃기는 법을 까먹은 책이다. 덤덤하거나 먹먹하다. 주변에 한둘은 있기 마련인 이런 진지한 유형이 잠깐이나마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은, 어떤 물음을 들었을 때가 아닐까. 가령, 자기 고백과도 같은 조금 근원적인 의문. 내가 그렇게 해야 했을까,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 인물들은 답을 모른다. 그게 우리와 닮아서, 소설 속의 짧은 외출이, .. 더보기
스테레오 타입을 뒤엎은 조각 퍼즐의 유쾌함, 『퀴르발 남작의 성』 퀴르발남작의성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최제훈 (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세보기 『퀴르발 남작의 성』이 조각 퍼즐을 닮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형식, 내용, 인물 등 다양한 층위에서 말이다. 강의와 대화, 인터뷰, 뉴스를 조합하거나(「퀴르발 남작의 성」), 사건과 사건의 닮은 절단면(「그녀의 매듭」)을 통해 서사가 진행된다. 기존 캐릭터의 특징을 절묘하게 교합하며(「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휘뚜루마뚜루 세계사1」, 「괴물을 위한 변명」), 한 인물이 다수의 인물로 파편화되거나(「그림자 박제」), 내부에서 캐릭터를 직조해나가기도(「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에필로그인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로 이 책은 하나의 거대한.. 더보기
소설로 태어나기 전, 그 위태로운 자취, 『뱀』 뱀윤보인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윤보인 (문학과지성사, 2011년) 상세보기 표제작이자 책의 첫 작품인 「뱀」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여지없이 마지막, 질 속에서 키우던 뱀을 보는 순간이다. 뱀이 삼킨 반지, 그 뱀이 똬리 튼 내 질. “여기에 숨어 있었다니.” 인물의 행동을 천천히 좇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이 이미지는, 그 뒤의 모든 단편들과 어떤 비정상적인데서 오는 이물감을 공유한다. 「악취」부터는 본격적이다. 악취에 집착하는 나. 작가는 마이너한 감정을 집요하게 그려내는 데, 그 시선은 동의를 구하기보다 일반에 배타적인, 꼬부장한 눈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야. 내 선택이고 자유야.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제각각 쓰레기들이 있지. 더러운 찌꺼기들. (중략) 토해내지 마. 악몽이 아니야. .. 더보기
독서단상2. 『저녁의 구애』 외 1. 덫 그 이전, 『저녁의 구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구애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편혜영 (문학과지성사, 2011년) 상세보기 사육장쪽으로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편혜영 (문학동네, 2007년) 상세보기 키워드는 '덫'이다. 시종 섬짓하다. 가장 가벼운 것이라도 의뭉스럽고, 암울한 것은 장을 넘기기도 찝찝하다. 그러나 끔찍이나 참혹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사건에 무릎 꿇려 울고 있지 않다. 인과의 앞이나 뒤, 혹은 양 쪽이 잘린 채,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걸어만 가고 있다. 넘어지고 있는, '기우뚱'의 시간. 『사육장 쪽으로』가 이 순간을 꼬집어 늘려놓았다면, 『저녁의 구애』는 그 끝을 이어 동그마니 붙여놓았다. 반복의 덫이다. 그래서인지 전작의 묘사에 동물성이.. 더보기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좋은 배우가 아니다", 『배우에 관한 역설』 배우에관한역설(문지스펙트럼:세계의고전사상2)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지은이 드니 디드로 (문학과지성사, 2001년) 상세보기 테오도르 생크가 지적한 것처럼, 미학자와 예술가는 각각 실제적 지식과 미학적 담론에서 서로만큼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예술가의 통찰력과 철학적 결론이 거의 일치하지 않는” 그 우왕좌왕함 덕분인지, ‘예술 작품’이 자신의 이름을 발판삼아 신비적으로 해석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최근 접한 “그냥 조용히 보고 각자 알아서들 생각하라”는 댓글이, 무개념 악플에 대한 다분히 짜증어린 분노였겠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각자 판단하라는, 그 담론의 부재 때문에. 찜찜함은, 한번 쯤 다뤄질 법한 치열한 논쟁점이 소위 ‘아카데믹한’ 몇몇 인물들에게만 회.. 더보기
독서단상1. 『달려라, 아비』 외 1. 당신 눈으로 보면 나도 소설일까요, 『달려라, 아비』 달려라아비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애란 (창비, 2005년) 상세보기 글 속에 담긴 '나'는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불안하거나 고립되어있다. 그러나 급박하지 않고, 결핍은 화장실의 물때처럼 고만하게 끼어있다. 소설의 배경은 너무나도 가까운 일상이며,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일상의 움직임을 갖지만, 그들의 상념만은 다분히 '소설적' 언어로 펼쳐진다. 감정을 현명하게 풀어내는 때문인지, 색채감 있는 언어를 리듬감 있게 배치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일상은 평범한 시간 특유의 지루함이 없다. 소설은 자잘한 진동의 긴장 속에서-일상도 잘 더듬으면 소설 같아지는 것인지, 소설도 잘만 하면 일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인지 갸웃거리며- 내 손에 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