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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독서단상6.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외 1. 갈피를 못 잡게 하는 입체적 구성의 즐거움,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일곱개의고양이눈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최제훈 (자음과모음, 2011년) 상세보기 진부하거나 위험한 표현일지라도, 전무후무하다고 말해야겠다.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 정도가 아니다. 읽고 있던 텍스트가 누군가의 소설이 되고, 그 서사는 다시 한 번 누군가의 발화 내용이 된다. 수많은 겹 속에서 독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 있던 위치를 잊는다. 이것은, 무수한 평면과 평면이 입체로 관계 맺는, 일종의 페이퍼 아트와 같다. 자꾸만 끊어지는 데도 코를 박게 하는 미스터리의 흡인력은 어지간하다. 전작처럼- 전작보다 더욱- 얇은 할 말이 오로지 아쉽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어떤 주제를 끌어낼 것도 없다. 소설의 담론은 에셔의 .. 더보기
독서단상5. 『제리』 외 1. 이 빌어먹을 외로움 속에서, 제리, 날 그냥 가만히 안아줄래, 『제리』 제리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혜나 (민음사, 2010년) 상세보기 이런 식으로 외로워 본 적이 있다. 아니, 외롭다는 것이 대개 이런 식일 것이다.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이런 전언.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생각하고 이해해… 아니야, 다 괜찮으니까, 지금은 “제발, 가만히 안고 있어줘.” 언젠가 이 소설에 대한 평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섹스와 음주에 탐닉하는 이 한심한 20대에게, 열심히 살고 있는 20대가 얼마나 공감할 지 모르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에게 물어보면 “글쎄.” 이렇게 답해야겠다. 진짜 루저건, 가끔씩 루저가 되건, 엄살만 피우는 것 같은 非루저건, 적어도 내가 아는 많은 경우에는.. 더보기
이 관능하는 욕망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요: 소설 『은교』와 영화「은교」 관능적이다. 박범신, 『은교』, 프롤로그 중 13쪽. 한 편의 글을 마무리 짓는 문장 중 이렇게 꿈틀거리는 것을 본 적 있었나. 액체를 뿜어 휘갈긴 듯 이 생생한 다섯 글자는, 게다가, 이런 머리의 끝에 달렸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p7) 망자의 입으로 내뱉기 때문에 이 ‘관능’은 어떤 에로티시즘을 벗어나 생명력에 대한 절절한 욕구로 읽혔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뒤통수를 힘껏 쳐 내 온몸의 구멍을 열었다. 그 순간, 아름다워서요, 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그랬다. “그저 묻혀버릴 게 싫어서 그랬다”고, 작품을 훔쳐 발표 한 뒤 스승 이적요에.. 더보기
독서단상4. 『달의 바다』 외 1. 꿈에 살지 않아도 괜찮아, 어쩌면 진짜로, 『달의 바다』 달의바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정한아 (문학동네, 2007년) 상세보기 그녀는 달을 밟지 못했을 때 행복하기를 멈추었는가. 우리는 꿈에 닿지 않았을 때 살아가기를 멈추겠는가. 책은 너무나도 선량한 “아니야, 괜찮아”의 글이다. 그런데, 이루지 못했고 나아진 것이 없는데도 괜찮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변변찮은 말인가. “환상이 현실을 압도할 때도 있다”는 성석제 작가의 평을 빌리자. 고모의 편지는 (소설 속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다시 한 번, 작가의 글은 (소설 밖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가령 이런 부분들. 고모의 비밀을 알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 더보기
독서단상3. 『장국영이 죽었다고?』 외 1. 하드보일드와 가까워지는 짧은 순간, 『장국영이 죽었다고?』 장국영이죽었다고?김경욱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05년) 상세보기 아마 이 소설집에서 그런대로 가장 경쾌한 부분은, '검은 정장을 입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소리 없이 매표소 앞에 집결했다가', '아무일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일 듯 하다. 웃길래야 웃기는 법을 까먹은 책이다. 덤덤하거나 먹먹하다. 주변에 한둘은 있기 마련인 이런 진지한 유형이 잠깐이나마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은, 어떤 물음을 들었을 때가 아닐까. 가령, 자기 고백과도 같은 조금 근원적인 의문. 내가 그렇게 해야 했을까,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 인물들은 답을 모른다. 그게 우리와 닮아서, 소설 속의 짧은 외출이, .. 더보기
독서단상2. 『저녁의 구애』 외 1. 덫 그 이전, 『저녁의 구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구애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편혜영 (문학과지성사, 2011년) 상세보기 사육장쪽으로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편혜영 (문학동네, 2007년) 상세보기 키워드는 '덫'이다. 시종 섬짓하다. 가장 가벼운 것이라도 의뭉스럽고, 암울한 것은 장을 넘기기도 찝찝하다. 그러나 끔찍이나 참혹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사건에 무릎 꿇려 울고 있지 않다. 인과의 앞이나 뒤, 혹은 양 쪽이 잘린 채,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은 기분으로 걸어만 가고 있다. 넘어지고 있는, '기우뚱'의 시간. 『사육장 쪽으로』가 이 순간을 꼬집어 늘려놓았다면, 『저녁의 구애』는 그 끝을 이어 동그마니 붙여놓았다. 반복의 덫이다. 그래서인지 전작의 묘사에 동물성이.. 더보기
언어생활자가 꿰어낸 절망의 감각, 『숨그네』 숨그네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년) 상세보기 그곳에 사건이 있을 리 없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는 일상의 반복뿐이다. 감각만이 순간 쌓였다가 이내 잊혀 허물어진다. 흐름을 만드는 것은 문이 열릴 때만이 가능한데, 5년간 막혀있는 수용소에 시퀀스와 내러티브가 넉넉할 리 만무하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자연히, 서사를 아낀다. 2차 대전 종전을 즈음한 소련의 수용소를 그린 이 책은, 절망에 빠지게 된, 혹은 절망에서 나오게 된 흐름을 서술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이로부터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분명 스토리의 절제나, 절망 그 자체의 묘사는 두 작품의 동류항이다. 그러나 『로드』가 '걸음'이라면 『숨그네』는 '정지'고, 그래서 '축적'.. 더보기
독서단상1. 『달려라, 아비』 외 1. 당신 눈으로 보면 나도 소설일까요, 『달려라, 아비』 달려라아비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애란 (창비, 2005년) 상세보기 글 속에 담긴 '나'는 모두 저마다의 모습으로 불안하거나 고립되어있다. 그러나 급박하지 않고, 결핍은 화장실의 물때처럼 고만하게 끼어있다. 소설의 배경은 너무나도 가까운 일상이며,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일상의 움직임을 갖지만, 그들의 상념만은 다분히 '소설적' 언어로 펼쳐진다. 감정을 현명하게 풀어내는 때문인지, 색채감 있는 언어를 리듬감 있게 배치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의 일상은 평범한 시간 특유의 지루함이 없다. 소설은 자잘한 진동의 긴장 속에서-일상도 잘 더듬으면 소설 같아지는 것인지, 소설도 잘만 하면 일상을 그릴 수 있는 것인지 갸웃거리며- 내 손에 들.. 더보기
산문집 한 권에 빚을 지다,『느낌의 공동체』 느낌의공동체신형철산문2006-2009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신형철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약간 춥게 입는다. 추위는 사람을 쉽게 허전하게 만든다. 휴학을 세 번 했다. 걸음은 무거웠지만 방황이 훈장같았다. 항상 가방에 책이 한 바리다. 뭉친 어깨가 산만한데 이 무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떠내려가 버릴까봐. 내 20대 초반은 그러저러한 허세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중반에 발을 딛어서야 부끄러움을 알았다. 술에 취해 널부러진채 포기했던 가지런한 성실과, 멋있는 줄만 알고 끝내 깨치지 못한 치열한 고뇌를 누군가들이 했고, 하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렇게 가슴을 치던 길목에서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 변명 그분과는 운 좋게도 짧은 연이 닿았었다. 나에게는 간사와 기자란 관계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