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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극으로부터 정신병원의 탄생, 「리어왕」 2013년 10월 9일(수) 오후 3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연출 스즈키 타다시 극작 셰익스피어도가 스즈키 컴퍼니 1. 비극, 리어 단지 비참했기 때문에 희곡 「리어왕」은 오랫동안 문제작이었다. 리어왕은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저항하지 않아 숭고하지 못했으며, 안티고네처럼 절명을 감수하지 않아 비장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판도라의 상자가 인류의 모든 악덕을 뱉어내고 밑바닥에 남긴 것이 알고보니 ‘비참함’이었던 것 마냥, 셰익스피어는 하다못해 오셀로의 열등감도, 맥베스의 야망도 그에게 쥐어주지 않았다. 그의 어리석음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어서, 그의 불행에는 마땅한 당위가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한 문학가는 “작품의 결말을 다시 읽을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본질적으로 상연 할 수 없는.. 더보기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잊혀졌던 말, 「트로이의 여인들」 2013년 7월 27일(토) 오후 7시 반 게릴라 극장 예술감독 윤광진 극작 에우리피데스 용인대학교 뮤지컬연극학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현실과 유리돼버릴까 걱정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본다. 삶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를 공부하다 삶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연극이론을 공부하다가 막상 무대와는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고민들. 지금 와서는 우습도록 성급한 그 물음은 실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결국 서로 연결돼있었다. 가령, 『예외상태』를 읽고 나면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 소식을 듣게 되고, 『호모사케르』를 읽고 나면 난민수용소에 갇혔던 김인수씨의 인터뷰를 보게 되는 식으로.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는데, 현실에서 그러했듯 책에서도 해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책에서 그러했듯 현실에서도 나는 무력했다는 것.. 더보기
오레스테스야, 나는 아직 할 말이 있다, 「오레스테스 3부작」 2013년 6월 14일(금) 오후 8시 게릴라 극장 예술감독 이윤택 극작 아이스퀼로스 연희단거리패 한 선생님께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들어 “영웅에 초점 맞춘 비감이 오히려 살해된 개개인의 고통을 쉽게 잊히도록 했다”고 평했을 때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몇 번이고 눈이 붓도록 우는 것으로 그들의 재앙을 공유했다고 믿은 나로서는, 그때 용해돼버린 무엇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가볍게 망각하고 나서야, 곧 말라버릴 따뜻한 눈물의 위험함을 알겠다. 비극 속에도 선의가 있었다고 내뱉는 순간 우리는 비극 자체를 보기를 멈춘다. 그곳에도 화해의 여지가 있지 않았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도저히 봉합되지 않을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제 시대는, 삶에 필요.. 더보기
애들 장난이 아닌 바로 우리의 무엇, 「아일랜드」 2013년 2월 12일(화) 오후 8시 게릴라 극장 연출 서지혜 극작 아돌 후가드 최무인, 남동진 오랜 친구와 밤이 짧도록 수다를 떨었다.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연애도 여행도 잡다한 사건들도 허다했을 텐데, 그만 어떤 부정들에 대해 가장 열심히 얘기하고 말았다. 사회 초년생의 적응이란 이런 것이었다. 편법과 융통의 아슬아슬한 경계들을 배우기. 이제 온전히 정당할 수 있는 것은 좁은 자취방 안에서만 가능한 듯, 우리는 모처럼 정성을 다해 분개했다. 그러나 말미에 내린 결론은 참담한 것이었다. 아등바등 잘 끼여 살기란 벌써부터 지치지만, 그렇지 않게 살기란 더욱 난감하다는 사실. 나에게는 그 순간 스치는 얼굴들이 있었는데, 장애물이 있건 말건 직각 반듯이 걸어 다니는 모 만화의 교수님 같은, 진지하거나 .. 더보기
진정성의 칼은 모두의 목을 겨눈다, 「전하의 봄」 2012년 4월 21일(토) 오후 3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연출 김승철 극작 이해성(원작 신명순) 창작공동체 아르케 이를테면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에디푸스 왕」(Oedipus Rex, 1967)을 들 수 있겠다. 영화에서 코린토스와 테베를 잇는 오이디푸스 여로의 양쪽 끝은, 현대의 모로코다. 이런 시퀀스가 상징하는 것은 물론 빤하다. 현재에도 과거의 고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어떤 학자가 학생에게 신숙주를 연기해보라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연극이라면, 역시 동일한 목적이었겠다.(「전하」, 1962) 그런데, 2012년에는 이런 연극이 올랐다. 액자의 틀이었던 현실이 기를 쓰고 극에 침투한다. 과거의 서사를 분절하고 몰입을 와해한다. 연극 「전하의 봄」이다. 장면을 보자. 무대 위는 한 연극.. 더보기
소통불능자를 연기하는 관객맹신자, 「변두리 극장」 2012년 1월 22일(일) 오후 4시 게릴라극장 연출 오동식 원작 카를 발렌틴 배역 이승헌, 홍민수, 김철영, 배미향 남다르다. 극 10분전부터 공연장 문을 열어놓고 관객을 들인다. “올해 목표가 뭐에요? 다이어트라고?” 묻다가, 어정어정 신문을 펴든다. “13억을 받았대. 안 많아 보여요?” 실수도 천연하다. “거기 좀 비켜줘요. 우리 조명 오퍼(레이터)가 못 올라갔어요.” 이쯤 되면, 거의 ‘관객의 간을 보는’ 수준이다. 웃을 준비가 됐나,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됐나. 아니라면 물론, 끝내 준비시킬 사람들이다. “그, 왜 신문만 읽으면 숙연해지나.” 관객 일동, 웃음. 우연히 티켓을 얻은 부부의 대화를 시작으로, 연극은 ‘변두리극장’의 리허설과 공연 사이사이 단막극을 집어넣었다. 리허설 직전 지휘자.. 더보기
공연단상1. 「대학살의 신」외 1. 이 혼돈이 균형이다, 연극「대학살의 신」 2012년 1월 1일(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연출 한태숙 원작 야스미나 레자 배역 박지일, 이대연, 서주희, 이연규 학살당한 것은 이야기뿐이다. 사회인답게 애들 싸움질의 뒷수습에 나선 두 부부, 그리고 무례, 시비, 언쟁, 몸싸움……. 이 극에서 번듯한 서사를 찾기보다는, 차라리 폴락 류의 이미지라고 이해하는 편이 낫겠다. 형식을 잃은 말들이 톡톡 튀길때, 단정한 두 부부는 조금씩 망가진다. 이 혼란이 극을 난장판이라는 자리에 붙들어 놓는다. 빠른 대사가 주제를, 겨냥점을, 온도를 계속 바꿔가며 서로를 오간다. 이 기막힌 타이밍과 앙상블이 극의 진짜 관전 포인트다. 핸드폰에서 아프리카로, 다시 술주정으로, 안 좋은 속, 버린 햄스터, 약, 백합.. 더보기
이것은 절대로 운명이 아닙니다, 「가면과 거울: 오레스테이아 ver.1.3」 2011년 12월 7일(토) 오후 7시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 인문대학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과거 그것은 운명이었다. 아비가 딸을 죽이고, 아내는 남편을 죽이고, 아들이 어미를 죽이는.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을 다룬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의 오랜 고전을, 극은 젊은 눈동자로 직시하고 있다. 그 젊음이 단순히 현대적 변주에 그쳤다면 분명 따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전의 재현자는, 충실하게 이야기에 뿌리박고 있되, 옛 세계관을 살해하고 다시 태어났다. 죽이고 죽이는 사건 속에서, 그들이 칼을 들고 묻는다. 진짜로 운명인가. 물음은 '이 가문에 아교처럼 엉겨있는 재앙'만큼이나 집요하다. 대각선으로 길이 나 있다. 어둠 속에 도드라진 그 직선은, 배우의 동선이자, 인물간의 거리距離, 운명에의 길,.. 더보기
88만원 세대의 현실극, 그렇다면 내일은 어디에 있는가, 「서울테러」 2011년 12월 31일(토) 오후 4시 대학로 배우세상 소극장 연출 김갑수 원작 정범철 배역 남수현, 한재영, 우수정, 지환 딱 봐도 빈貧한 단칸방이다. 무대 위에서 배우가 라면을 끓여 먹는다. 5년째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33세 백수 황장복이다. 7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막 헤어졌고, 외상값은 밀려있는데다, 전기와 수도, 보일러까지 끊겼다. 사건은 이러한 궁지에서 발아한다. 「서울테러」는 취업난에 허덕이는 88만원 세대에 관한 이야기다. 이 극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면 어떨까. 현실을 담은 극 「서울테러」는 정말 ‘현실적인 극’인가. 표현의 범주에서라면 극중 먹는 장면을 주목하는 게 좋겠다. 배우들은 열심히 먹는다. 라면부터 짜장면, 짬뽕, 단무지까지. 언제나 그렇듯 궁핍의 가장 대표적인 어휘는 주림.. 더보기
몸의 언어로 각색한 원시적 건강함, 「템페스트」 2011년 12월 23일(금) 오후 8시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연출 오태석 원작 셰익스피어 극단 목화 막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거다, 싶은 공연이 있다. 오태석의 「템페스트」가 그렇다. 태풍이 몰아쳐 배가 난파되는 다이내믹한 이 첫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무대가 또 있을까. 암전. 북소리가 극의 시작을 알린다. 막이 오른다. 파도의 부서짐보다 더 희뿌연 무대. 잔뜩 고인 스모그가 흘러나와 관객들을 몽환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전무前無한 무대 장치라니. 무대 위에는 배우 외에, ‘아무것도 없다’. 『연극적 상상력』의 저자 로버트 에드먼드 존스는 “연기만 훌륭하면 장치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것이다”라고 했었나. 이 말에 의구심이 든다면 조금 수정을 해도 좋겠다. 장치 없이도, 훌륭한 극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