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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몇 가지 실패담: 소설 『김 박사는 누구인가?』 김박사는누구인가이기호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이기호 (문학과지성사, 2013년) 상세보기 “안녕하세요, 저는 천구백팔십팔 년 팔월 이십오 일 태어난 ‘백수향’이라고 합니다. 칠 년 간 대학을 다녔고, 십 학기를 등록했으며, 휴학 두 번, 이천십삼 년 팔월 이십구 일자로 졸업합니다. 혈액형은 O형이고, 무남 이녀 중 차녀, 몸무게는 오십삼 킬로그램이구요. 지금 소설 『김 박사는 누구인가』 얘기 좀 하려는데, 근데 저기요, 혹시… 저 아세요?” 나는 누구인가. 이제는 당신도 알고 있을 몇 가지 표면적 사실들과, 당신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과, 나조차도 알지 못할 심연의 무엇으로 이루어진 나. 우리는 누군가의 정면을 보기 위해 늘 저 세 가지 범주 어딘가에서 고민하지만,.. 더보기
웃고 있지만 슬픈, 슬퍼하지만 웃긴, 『이원식씨의 타격폼』 이원식씨의타격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박상 (이룸, 2009년) 상세보기 소설은 막무가내다. 되든 말든 웃겨보려고 부단히 개그를 치는 주변의 누군가를 기억하게 한다. 아무려나 싶게 쓰인 단어며 문장, 상황이 눈치 없다 싶을 정도로 열성이다. (심지어 첫 문단 여백이 없는 책의 편집까지 ‘들이댐’을 닮았다.) 그 우스운 진지함은 워낙 진심으로 웃겨서 도저히 흘려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애정하는 사람만이 이 경지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이원식 씨의 타격 폼」에 등장하는 한 부박한 야구선수를 보자. 비루먹은 포즈가 유일한 장기로 돌변해버리는 폭소의 상황은 오직 그가 야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의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라거.. 더보기
이 관능하는 욕망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요: 소설 『은교』와 영화「은교」 관능적이다. 박범신, 『은교』, 프롤로그 중 13쪽. 한 편의 글을 마무리 짓는 문장 중 이렇게 꿈틀거리는 것을 본 적 있었나. 액체를 뿜어 휘갈긴 듯 이 생생한 다섯 글자는, 게다가, 이런 머리의 끝에 달렸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p7) 망자의 입으로 내뱉기 때문에 이 ‘관능’은 어떤 에로티시즘을 벗어나 생명력에 대한 절절한 욕구로 읽혔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뒤통수를 힘껏 쳐 내 온몸의 구멍을 열었다. 그 순간, 아름다워서요, 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그랬다. “그저 묻혀버릴 게 싫어서 그랬다”고, 작품을 훔쳐 발표 한 뒤 스승 이적요에.. 더보기
독서단상4. 『달의 바다』 외 1. 꿈에 살지 않아도 괜찮아, 어쩌면 진짜로, 『달의 바다』 달의바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정한아 (문학동네, 2007년) 상세보기 그녀는 달을 밟지 못했을 때 행복하기를 멈추었는가. 우리는 꿈에 닿지 않았을 때 살아가기를 멈추겠는가. 책은 너무나도 선량한 “아니야, 괜찮아”의 글이다. 그런데, 이루지 못했고 나아진 것이 없는데도 괜찮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변변찮은 말인가. “환상이 현실을 압도할 때도 있다”는 성석제 작가의 평을 빌리자. 고모의 편지는 (소설 속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다시 한 번, 작가의 글은 (소설 밖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가령 이런 부분들. 고모의 비밀을 알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 더보기
스테레오 타입을 뒤엎은 조각 퍼즐의 유쾌함, 『퀴르발 남작의 성』 퀴르발남작의성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최제훈 (문학과지성사, 2010년) 상세보기 『퀴르발 남작의 성』이 조각 퍼즐을 닮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형식, 내용, 인물 등 다양한 층위에서 말이다. 강의와 대화, 인터뷰, 뉴스를 조합하거나(「퀴르발 남작의 성」), 사건과 사건의 닮은 절단면(「그녀의 매듭」)을 통해 서사가 진행된다. 기존 캐릭터의 특징을 절묘하게 교합하며(「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 「마녀의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고찰-휘뚜루마뚜루 세계사1」, 「괴물을 위한 변명」), 한 인물이 다수의 인물로 파편화되거나(「그림자 박제」), 내부에서 캐릭터를 직조해나가기도(「마리아, 그런데 말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에필로그인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로 이 책은 하나의 거대한.. 더보기
소설로 태어나기 전, 그 위태로운 자취, 『뱀』 뱀윤보인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윤보인 (문학과지성사, 2011년) 상세보기 표제작이자 책의 첫 작품인 「뱀」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여지없이 마지막, 질 속에서 키우던 뱀을 보는 순간이다. 뱀이 삼킨 반지, 그 뱀이 똬리 튼 내 질. “여기에 숨어 있었다니.” 인물의 행동을 천천히 좇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이 이미지는, 그 뒤의 모든 단편들과 어떤 비정상적인데서 오는 이물감을 공유한다. 「악취」부터는 본격적이다. 악취에 집착하는 나. 작가는 마이너한 감정을 집요하게 그려내는 데, 그 시선은 동의를 구하기보다 일반에 배타적인, 꼬부장한 눈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야. 내 선택이고 자유야.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제각각 쓰레기들이 있지. 더러운 찌꺼기들. (중략) 토해내지 마. 악몽이 아니야. .. 더보기
언어생활자가 꿰어낸 절망의 감각, 『숨그네』 숨그네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년) 상세보기 그곳에 사건이 있을 리 없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는 일상의 반복뿐이다. 감각만이 순간 쌓였다가 이내 잊혀 허물어진다. 흐름을 만드는 것은 문이 열릴 때만이 가능한데, 5년간 막혀있는 수용소에 시퀀스와 내러티브가 넉넉할 리 만무하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자연히, 서사를 아낀다. 2차 대전 종전을 즈음한 소련의 수용소를 그린 이 책은, 절망에 빠지게 된, 혹은 절망에서 나오게 된 흐름을 서술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이로부터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분명 스토리의 절제나, 절망 그 자체의 묘사는 두 작품의 동류항이다. 그러나 『로드』가 '걸음'이라면 『숨그네』는 '정지'고, 그래서 '축적'.. 더보기
삶의 농담에 치인 자들에 대한 위로, 『농담』 농담(세계문학전집29) 카테고리 소설 > 기타나라소설 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1999년) 상세보기 『농담』은 가볍게 던진 농담의 대가로 사회에서 매장당한 루드빅의 복수담이다. 탄광에 보내진 뒤 15년 만에 고향에 찾은 그는 사랑했던 여인, 별 볼일 없어진 친구, 그를 버린 옛 동료 등을 만난다. 그의 동선과 기억을 통해 엮여가는 소설 속 거의 모든 인물은 무엇엔가 실패한 인생들이다. 시대를 자신들의 손으로 열고자 했던 열기가 환상이 됐고, 진정한 사랑은 물거품이 되며, 평생 믿어온 가치는 멸시 당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고 작은 오차가, 진실이라 생각됐던 것들이 기실 그렇지 않았을 때의 낙차가 있다. 이 소설은 역사, 혹은 시간이 던진 농담에 얻어맞은 피해자들의 조서다. 농담이란 무엇인가. 이는 .. 더보기
산문집 한 권에 빚을 지다,『느낌의 공동체』 느낌의공동체신형철산문2006-2009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신형철 (문학동네, 2011년) 상세보기 약간 춥게 입는다. 추위는 사람을 쉽게 허전하게 만든다. 휴학을 세 번 했다. 걸음은 무거웠지만 방황이 훈장같았다. 항상 가방에 책이 한 바리다. 뭉친 어깨가 산만한데 이 무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떠내려가 버릴까봐. 내 20대 초반은 그러저러한 허세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중반에 발을 딛어서야 부끄러움을 알았다. 술에 취해 널부러진채 포기했던 가지런한 성실과, 멋있는 줄만 알고 끝내 깨치지 못한 치열한 고뇌를 누군가들이 했고, 하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렇게 가슴을 치던 길목에서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 변명 그분과는 운 좋게도 짧은 연이 닿았었다. 나에게는 간사와 기자란 관계가.. 더보기
차라리 가난이었으면,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신에게는손자가없다김경욱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경욱 (창비, 2011년) 상세보기 일상속에서 가난과 궁상은 부지런히 서로의 경계를 오간다. 어릴 적부터 ‘어디가서 기죽지는 말거라’가 중요한 가훈이었던 덕분에 나는 집에 손을 벌릴망정 어지간한 경우에도 돈 없는 티는 내지 않았다. 풍요는 가난을 낭만으로 읽게한다. 찌질하지 않은 가난은 젊음의 상징이 되고, 부도덕한 부에 대한 반항이 되고, 시와 소설의 소재가 됐다. 자취를 하고 나서야 어렴풋히 궁상을 알았다. 찌질함은 다소 이상한 곳에 있었다. 배를 곯는 것보다 BB크림이 떨어지는 게 궁상맞았고, 집에 걸어서 가는 것보다 빨래 세제가 떨어지는 게 궁상맞았다. 어느 순간 내가 어떤 스토리에 기대하는 것은 손바닥에 땀이 나도록 낯부끄러운 궁핍..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