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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Musical

착한 명작에 대한 섬세하고 현실적인 오마주,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2011년 12월 30(토오후 8시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연출 신춘수  음악감독 변희석  
배역 조강현, 정동화
  

믿어버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면 프랑크 카프라 감독의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1946). 마을을 위해 일한 조지 베일리가 파산 직전, 사람들의 도움을 모아 다시 일어나는 이 영화는 넘치도록 착하다. 그러니까 이건, 훌륭하지만, 그저 바람hope일 뿐이다.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자살을 막아줄 천사가 없는 만큼, 더 현실적이다.
 
극은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책 사이사이 박힌 조명 속, 물결 같은 피아노 반주를 타고, 소년들의 성장담이 그려진다. 해설과 극을 넘나드는 장면 엮임은 유연하고, “세상 살 땐 하나보다 둘이 낫다는 걸/…/우리 엄만 천사를 보고 난 널 봤어”라며 할로윈의 만남을 “나는 나비야/…/네 날갯짓에 이 세상이 변한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노래할 때 무대에는 온기가 번진다. 옛 친구와 영영 엇갈리게 된 한 남자의 답답함이 안쓰럽고 아릿하다.
 
추억을 부르는 노래는 인상적일만큼 아름답다. 하늘빛의 선율이 부풀어있다. 그러나 이 뮤지컬의 시간은 음악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단번에 귀에 와 박히는 멜로디가 없다. 오롯하게, 노래는 서정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 가사나 멜로디의 반복을 통한 감정의 극화劇化 없이, 노래는 음의 속도·격앙·펼침 등을 미세하게 조정해 극을 스케치한다. 다른 작품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사 그 자체가 된 음악은, 이 뮤지컬이 단조롭고 굴곡없는 대신 섬세한 선을 만들어 내는 이유다.
 
극에서 그나마 긴장이 팽팽한 부분은 작가로 성공한 토마스와, 책방을 운영하는 앨빈의 대치 장면이겠다. “왜 안와”라고 애타게 친구를 부르다, “소재는 어디서 왔어?”라며 입에 담아서는 안됐을 그 말을 물을 때. 이 고조의 피상에서 자살의 이유를 더듬는다면, 토마스가 내쳐버린 우정의 균열이 그 원인일까. 어딘가 아쉬운 추측이다. 그렇다면 앨빈은 속좁은 애정결핍자로 주저앉아 버리고, 토마스가 기억을 글로 엮어낸 노력은 억울하지 않겠나.
 
그러니, 원점으로 돌아가, 앞선 말을 정정하자. 극은 단순히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멋진 인생’을 실패한 삶의 회고이며, 영화 「멋진 인생」의 오류를 향한 판명이다. 현실에는 천사 클라란스도, 이해해줄 연인도, 곁에서 손을 내밀 마을 사람들마저 부재한다. 극은 (어쩌면 조지처럼 밖을 갈망했으나 마을을 믿기로 결심한, 그러나) ‘필요한 건 다 여기 있’지 않음을 깨달은 남자의 최후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딱한 인생이,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뭘까. 천사 클라란스가 하늘로 올라가며 조지에게 남긴 문구, ‘Remember no man is a failure who has friends(친구가 있는 한 실패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를 떠올려보자. 비극의 자리에 그보다 넓게, 함께한 기억이 자리를 꿰어차고 앉아있다. 어떻게든 진실한 송덕문을 쓰겠다 과거를 더듬는 지기의 절망어린 표정이야말로, 「멋진 인생」에 대한 충실한 오마주다. 장례의 종이 울린다. 이 박한 현실에 부합할 단 하나의 정답, 극은 다시, 우정에 대한 스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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