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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etc.

그들의 것이게 하라: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윤리

 

결국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영화의 굵은 얼개는 유괴범 류(신하균)에게 딸 유선을 잃은 동진(송강호)이 복수하는 것이지만, 복수는 동진만의 것이 아니다. 복수는 차라리 모든 인물들의 것이다. 류는 누나의 수술비를 갈취한 장기밀매단에게, 무정부주의자들은 동지를 살해한 동진에게, 영미는 자본주의 사회에, 부하는 사장에게. 이렇게 영화는 전형적 복수극의 문법에서 비켜있다. 「복수는 나의 것(Sympathy For Mr.Vengeance)」은 주인공과 적의 일대일 대응이 아닌, ‘복수자’의 위치에 서기위한 아귀다툼이어서, 관객들은 ‘동정’할 대상을 쉽게 정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복수를 나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기에. 영화의 종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떤 외곬적 대사는 이 복수에의 집착을 이해하는 유의미한 지점이 된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마음 이해하지?” ‘착한-그러니까-죽이는’의 불편한 엮임을 통해 앞뒤 문장은 묘하게 어긋나있다. 그 비끌림을, 자신에게 침투해오는 외부서사에 대한 동진의 난감하고 절박한 거절로 읽어보면 어떨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류의 상황은 충분히 안타깝고, 유선의 죽음은 우발적 사고다. 류는 어쩌면 착한 사람이다.(오죽하면 영화의 첫 대사가 “전 착한 사람입니다”일까.) 그러나 류가 흉악범에서 이해가능한 인물로 위치를 옮기는 순간, 그 틈새로 동진에게는 이런 것들이 밀려들어올 것이다. 딸을 제때 구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세상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무력감, 곧 저지를 살인에의 죄책감 같은 것. 류는 유괴범으로서 죽어야 한다. 이를 포기하면 동진은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온 서사가 일그러지는 순간 스스로 파괴되어버릴 인간이다.

 

인물들이 더 없이 잔인하게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자기서사를 관철시킨다는 것은 타인의 서사를 끊어내는 것이어서, 때로는 타자를 자백시키고(영미를 전기고문하고), 때로는 타자를 베어낸다(류의 발뒤꿈치를 자른다). 자신이 죽인 자들의 신장을 씹어 먹는 류의 행동 역시 강박적이다. 죽인 뒤에도 죽인 자들을 계속 기억해야만하는 것처럼. 그 지독한 복수심을 통해서만, 류는 자신이 병든 누나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한 사실이나, 누나가 자신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자살했다는 사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

 

애초부터 그들은 난자당할 운명이었다. 오롯한 자기서사의 완성은 불가하다. 그곳에는 세계와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진퇴양난. 인물들은 복수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너질 상황이었을까. 혹자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고 말할 것 같다. 가령 아렌트는 ‘용서’를 설명할 때, 자기서사를 무너뜨리지 않고 세계와 교합할 수 있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구한다.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행위이기에, 복수와 용서는 같은 얼굴의 다른 표정이 아닐까. 그렇다, 그녀가 옳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이 ‘영화가’ 배워야 할 것보다는, ‘영화에게’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용서에는 반드시 영화가 지독하게 뱉어낸 윤리가 전제돼야 한다.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구약성서의 한 문장에서 떠올렸다고 한다. “유대민족을 괴롭히는 인간들은 내가 다 처치하겠다.”(「신명기」) 야훼의 전언과 영화의 제목 사이에는 이런 대꾸가 있지 않을까. “신이여, 당신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복수는 나의 것. 오늘날 어떤 이들은 마치 야훼처럼 타인의 용서를 대신 행한다. 용서는 누구의 것인가. 용서는 그들 각자의 것. 그들 자신의 말로 용서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