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view/etc.

이 관능하는 욕망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요: 소설 『은교』와 영화「은교」

 

관능적이다.

 

박범신, 『은교』, 프롤로그 중 13쪽. 한 편의 글을 마무리 짓는 문장 중 이렇게 꿈틀거리는 것을 본 적 있었나. 액체를 뿜어 휘갈긴 듯 이 생생한 다섯 글자는, 게다가, 이런 머리의 끝에 달렸다. 프롤로그의 첫 문장이다. “나는 2009년 이른 봄에 죽었다. 그렇게 믿는다. 아닌가. 어쩌면 겨울이 가기 전에 죽었는지도 모른다.”(p7) 망자의 입으로 내뱉기 때문에 이 ‘관능’은 어떤 에로티시즘을 벗어나 생명력에 대한 절절한 욕구로 읽혔다. 회광반조回光返照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뒤통수를 힘껏 쳐 내 온몸의 구멍을 열었다. 그 순간,

 

아름다워서요,

 

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 영화 「은교」에서 서지우가 그랬다. “그저 묻혀버릴 게 싫어서 그랬다”고, 작품을 훔쳐 발표 한 뒤 스승 이적요에게 억울한 듯 되레 성을 내며 말이다. 그렇다. 작가 박범신이 쓴 이적요의 글로부터 나는 억울할 정도로 탐나는 감각을 읽었다. 가령, “욕망이라면, 목이라도 베이고 싶은, 저돌적인 욕망이었다”(p24) 같은. 그것이, 쇄골을 치고 셔츠 안으로 굴러들어가는 땀방울에서 우주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토록 내 것이었으면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영화나 소설에서 “나이 먹어도 괜찮아, 사랑해도 괜찮아”같은 메시지를 읽은 것은 다소 편협한 해석이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자. 아니 정확히는, 오독일 가능성이 높다. 이 두 작품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와 동류항이 아니며, 「그대를 사랑합니다」, 「죽어도 좋아」 등 노인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영화들과도 추구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 “이젠 시들 줄도 모르는 저것들의 그늘이 지긋지긋하다”(p10)나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p251)에서 밝힌 것처럼 작품은 어떤 나이에 대한 긍부정이 아니다. 나이를 고려하지 않는 것, 차라리 ‘무정無定’이라고 해두자. 열일곱과 예순 아홉이라는 나이는 서사를 이끄는 환경을 만드는 데 필요하지만, 기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욕망에 대한 것이다.

 

 

『은교』, 좌절된 욕망 이후의 두 가지 대처법

 

 

무엇을 욕망하는가. 이적요에게 그것은 ‘호텔 캘리포니아’다. 어떤 곳인가. 나이 든 은교와 젊은 내가 마주한 그곳은 일말의 조건 없이 존재 자체(젊은 육체와는 다른 겸손함, 아늑함, 푸근함, p339)를 감각할 수 있는 곳, “존재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 삽입의 순간보다 더 황홀한 오르가슴일 수 있는”(p314) 곳이다. 또한 그곳은 자신의 글이 ‘세속에서 벗어난 완전무결의 문인’이라는 굴절을 거치지 않고 세상과 면대할 수 있는 곳이다. 이 호텔 캘리포니아를 가능케 하는 신성이, ‘별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거개의 세상은 호텔 캘리포니아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적요는 위악을 택한다. 위악이 무엇인가. 고전에서 찾자면, 위악은 세상에 대한 햄릿의 대처법이다. 그들은 스스로 위악하여 계획된 범죄(살인 또는 세상을 ‘엿 먹이는’ 것)로 나아간다. 왕자 또는 시성詩聖임을 허용한 햄릿들에게는 목표 외의 그 모두가, “마지못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더러 세상 속에 존재하는 ‘진짜의 것’들이 이 쓸쓸한 행위를 더욱 괴롭게 만든다. 오필리어, 혹은 은교가 그들이다. 이적요의 어떤 고백은 햄릿의 자기 파괴욕과 동일한 종류의 괴로움인데, 가령 이런 문장.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p97)

 

이번에는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욕망을 확인해보자. 미발표 원고와 은교를 탐한 “죽어도 좋을 무가치한 인간”이 행동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어떤 복잡한 심경 중에서도 서지우의 문장은 종내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에게로 내달린다. 서지우의 세상이며 서지우의 욕망은 결국, 스승이다. 그것도 자신이 믿는 그대로의 온전한 스승 이적요.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감정이 집요하게 반복된다.

 

아니, 길이 전혀 없을 땐 아, 당신을 죽여서라도, 당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진실로 말하건대, 나는 여전히, 아직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p330)

 

이런 유형의 인간에게 문제는, 그 ‘세상’이 자신을 밀어낸다고 느끼게 될 때 발생한다. 서지우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시인을 보고 있었다는 언급은 흥미롭다. “에로스적인 욕망이 당신 내부에서 참지 못하고 발화되어 터져 나오기를” 바라는 감정은 좌절에 대한 서지우의 대처법이 도드라진 부분이다. 내 것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부정, 흔히 말하듯, 질투다. 이번에는 오델로의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열등에서 나오는 파괴욕. “사랑하는 사람”이 망가뜨렸던 차를 몰고 가며 계속 울었다는 서지우의 뒷모습은, 손수건을 보고 마지막 이성을 놓아버린 무어인의 절규와 비견된다. Dio! mi potevi scagliar!(신이여 당신은 이 모든 치욕을 내게 안겨 주나이까!, 오페라 오델로 中)

 

이 두 가지 유형으로부터 은교의 다소 의뭉스러운 고백이 해소될 실마리를 얻는다. 그녀가 말한다. “할아버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에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p217) 정말인가. 어쩌면, 정말이다. 아마 두 사람의 감정이 본질적으로 같은 결을 갖기 때문이리라. 셰익스피어 비극의 서사는 세계에 좌절 된 개인의 대항 방식이다. 그래서 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닮아있다. 상대에 대한 그들의 어떤 감정은 자신의 상황과 겹쳐져 발현한다. 진정한 세계에 참여하지 못하는 제자에 대한 조소가 이적요 자신에게로 이어지고, 세상에 아랑곳없는 스승이 좌절하며 겪은 비감이 서지우 스스로에게 흘러들어간다.

 

 

그러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

 

 

이 『은교』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했다. 냄새가 있었다면 좋았을 영화라고 생각했다. 선명한 이미지 때문이다. 소녀의 하얀 웃음에서 번지는 생기로운 냄새가 시종 영상으로부터 느껴질 듯하다. 영화 대부분의 배경인 노작가의 집은, 책 먼지와 함께 햇빛의 냄새까지 맡아질 듯, 감각적으로 구현됐다. 온도가 있었으면 좋았을 영화라고도 생각했다. 허리를 파고든 채 잠든 이불 속 은교의 어깨선과, 헤나문신을 그리는 은교의 노란 스웨터는 숨 막히는 훈기를 이미지로 전환한다. 아마 서지우의 차 안은 언제나 차가웠으리라.

 

그러나 『은교』를 영화로 옮기는 데의 난점은, 이 서사가 외부적 행동보다 내면에서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있다. 움직임의 동기는 내밀한 곳에 존재했다. 아무리 시선으로 은교를 탐닉해도, 이 얽어진 욕망을 영상으로 온전히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화가 포기한 대표적인 장면을 짚어보자. 이적요의 상상 씬, 즉 소설에서 ‘호텔 캘리포니아’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젊은 이적요와 어린 은교의 이미지는 젊음을 향한 동경이며 늙음에 대한 서글픔이다. 이는 모든 부당한 관계의 추방(앞서 무정無定이라 칭한)이라는 원칙의 포기이며, 욕망의 타협이다. 그나마 해맑지 않은 이적요(박해일)의 표정이 다행이다. 그 묘한 일그러짐은 이 순박한 환상과 거리를 갖고 부유한다.

 

그러나 내려놓은 만큼 영화가 하고자 한 것은 분명했다. 결론부터 말하자. 소설이 대체로 이적요의 입이었다면, 영화는 서지우의 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은 ‘반역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 영원히 호텔 캘리포니아를 알지 못 할 ‘낙타들’에 대한 위로가 된다. 그것의 시도가 젊어진 인물들로부터 나온다.

 

먼저, (도저히 40대로는 보이지 않는) 어려진 서지우를 보자. 그의 눈빛은 마치 어미를 잃은 짐승과 같다. 배우 김무열은 깔끔한 외모 속에서 도드라지는 어린 눈빛 때문에 늘 웃자란 아이나, 불안한 어른이었다. 「쓰릴 미」, 「사랑은 비를 타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그렇고, 서지우가 그렇다. 그 눈빛은 시종 채근한다. 어떡하지. 왜 나는 안 되지. 선생님, 나를 좀 봐줘요. 영화는 이런 구절의 적극적인 시각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나의 선생님……이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졌다. 내 몸이 다음 순간 바닥을 알 수 없는 우물 밑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찢어지는 듯 가슴이 아팠다. 나는 가만히 쭈그려 앉아서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pp88~89)

 

영화에서, 스승에게 훔친 단편 「은교」를 발표하고 이상문학상을 타는 서지우에게 관계자가 “선생님은 소설을 읽고 뭐라고 하셨냐”고 묻는다. 대답. “너는 내 안에 들어왔다가 나간 것 같구나. 무섭다.” 훔친 것이 소설의 설정과 같은 ‘수많은 산문 중에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또, 절도의 동기가 명예욕이나 다급함보다는 탐미에 초점 맞춰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때문이었을까, 영화에는 서지우가 스승의 글을 고치는 장면이 없다.) 훔친 것은 「은교」, 즉 은교에 대한 감정, 바로 스승이 목표하던 세계다. 서지우의 한 마디를 더 끄집어보자. 차 안에서 그가 은교에게 입을 맞추고 난 뒤. “왜 나한테 이렇게 해요.” 서지우 답한다. “외로우니까.” 그 때 나는 앞선 말이 이렇게 떠올랐다. “나는 네 안에 들어왔다 나가고 싶구나. 외롭다.” 영화는 서지우가 가지고 있는 살리에르적 결핍감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안쓰러워한다.

 

서지우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존경심의 높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대다수의 관객에게 의문을 남겼을 배우 박해일의 이적요를 설명해 보면 어떨까. 이 ‘젊은’ 이적요의 눈빛과 목소리는 70살의 것으로는 어색하되, 욕망의 순간에 그리 추하지 않다. 은교의 몸을 탐닉하는 시선이 과감하게 들어가도 부담이 덜하다. 아직, 존경할만한 이적요다. 같은 이유로, 이상과 현실의 실재적인 괴리를 영화는 피해간다. 여자를 사러 간다거나, 젊은이에게 면박당한 추레한 순간 없이, 그 차이는 흐름에 생기를 주는 웃음 코드 정도로만 존재한다(“헐”).

 

그러니까, 영화는 이적요를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으로 한 번 더 높여 부르며, 이 어른의 사랑을 단방향의 조악한 욕구가 아닌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반열에 살짝 얹어보려 했던 것 같다. 영화의 후반부를 보면 더 분명하다. 원작과 다르게 영화는 은교가 사람을 사랑하는 원인을 아주 분명하게 설정해 놓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아름답게 바라봐 주는 사람을 그토록 애정한다는 사실은, 이적요의 감정을 ‘노망’이 아닌 ‘가능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다.

 

어쨌든, 작품은 모두 욕망에 관한 것이다. 이적요의 말이건, 서지우의 눈이건 이 드물 정도로 극렬한 갈망은 매료될 만하다. 나는 세상에 대한 시인의 반역이 아름다워 소설을 거의 혁명처럼 읽었고, 이 이야기를 미려하게 표현한 영화에 잔뜩 공감했다. (그러나 이적요라면 이 또한 코웃음 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설령 그 결말이 파국이라도, 어리석음뿐이라도,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자들은 도대체 이토록 아름다운가. 그들을 엿본 뒤 여러 날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그들의 다급한 욕망을 욕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