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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산문집 한 권에 빚을 지다,『느낌의 공동체』


느낌의공동체신형철산문2006-2009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신형철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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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춥게 입는다. 추위는 사람을 쉽게 허전하게 만든다. 휴학을 세 번 했다. 걸음은 무거웠지만 방황이 훈장같았다. 항상 가방에 책이 한 바리다. 뭉친 어깨가 산만한데 이 무게를 짊어지지 않으면 떠내려가 버릴까봐. 내 20대 초반은 그러저러한 허세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중반에 발을 딛어서야 부끄러움을 알았다. 술에 취해 널부러진채 포기했던 가지런한 성실과, 멋있는 줄만 알고 끝내 깨치지 못한 치열한 고뇌를 누군가들이 했고, 하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그렇게 가슴을 치던 길목에서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

변명

그분과는 운 좋게도 짧은 연이 닿았었다. 나에게는 간사와 기자란 관계가 익어 글에 대한 감상을 끼적이기에 민망하고, 내 조야한 글로는 이 애뜻한 산문집에 대해 운을 떼기가 미안하다. 벅참을 까먹을까봐 마음을 다잡고 감상을 적어둔다. 술자리에서 둘레둘레 앉아 떠든 얕은 넋두리들도 들어주셨으니, 후일 행여라도 발견케되면 무람을 눈 감아주시길.

서른, 글

그는 딱 서른같은 글을 쓰고 있었다. 젊은 글이다. 많은 경우 그 정체는 선량에서 비롯된 울분이다. “그들이 옳다. 그들은 늘 옳다. 그래서 싫다”(「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p185)고 언성을 높히고, “그날 하루 동안, 나는 그들을 내 안에 잔혹하게 장사 지냈고 조문하지 않았다”(같은 글, p187)고 눈을 힘줘 뜬다. 

여기에 위트와 솔직함으로 파랗게 벼려져 펄떡거리는 문장력이 더해지면 더욱 좋다. 그는 ‘재벌은 마치 조폭 같다’는 말이 현실이 되버린 어이없는 세상에서 “덕분에 쓸모 있는 비유 하나를 잃어버렸다”(「애비는 조폭이었다」, p244)고 의뭉스럽게 입을 다시거나,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좋겠다, 죽어서……」 , p123)고 ‘에잇, 모르겠다’ 능청스럽게 할 말을 던져버린다. 그러다 일순 정색하고 “그들이 그들의 죽음을 온전히 죽게 하고 그들의 울음을 온전히 울 수 있게 하라”(「그들의 슬픔을 그들에게」, p261)고 정언명령을 내릴 땐 그 진정성에 어금니를 꽉 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젊기만 하다면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실 내 또래가 절망이라던가, 폐허, 절정과 환희같은 것들의 품으로 뛰어들어가는 뒷통수를 보면 까닭없이 화가 난다. 실상은 자신의 무능을 향한 것이려니와, 너무 쉽게 안 것 아니냐고 따져묻고 싶어진다. 이 글은 가슴으로 뜨겁기는 뜨거운데, 수많은 독서와 사색으로 치기가 고르게 다듬어져서 현명하다.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대가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서 더욱 애가 탄다. 술자리 옆에 바싹 앉아 얘기를 듣고 싶은 현명한 선배에 대한 동경이다.

어린 사람이 아직 갖지 못한 공간과 기성이 잃어버린 온도를 가진 서른의 글. 그 어느껜가의 균형에서 그와 친우들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내 30대를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 재인용, p54)던데, 이렇게 살고 싶고 이렇게 죽고 싶음을 알았을 때야 서른이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평론하기

김혜리의 인터뷰 모음집 『진심의 탐닉』에는 묘한 미소를 짓게되는 부분이 있다. 씨네21의 뮤즈가 ‘흔히 비평가는 창작자에게 열등감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비평가의 은밀한 즐거움을 물을 때 그렇다. 인터뷰를 가장한 두 문장의 속밀담은 아마 이럴 것이다. 김혜리가 비평가는 창작자들의 가장 뒤에선 사람일거라고 애탄 한숨을 내쉰다. 문학평론가는 아니라고 도닥여줄 것이다. 아니라고, 비평가는 창작자들의 가장 앞에 서서 가장 먼저 껴안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런 자세의 차이는 동종 장르를 평하면서 스스로도 작품이 될 수 있었던 문학평론의 성격에서도 기인했겠지만, 『느낌의 공동체』가 평론의 열등을 극복한 방식은 철저한 토로다. 글이 종종 스스로를 말한다. 누군가가 얘기한 “메타포가 내 것인 듯만 해서 애달아”(「반성, 몽상, 실천」, p361)하고, “나보다 더 문학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불편하다”(「즐기는 자만 못하다」, p322)고 밝힌다. 인간적인 솔직함은 열등을 덮는 것을 넘어 평론집이 가진 매력이 된다. 이는 문학작품의 고백과는 다소 다르다. 창작물은 작가의 것이되, 작가 그 자체는 아니다. 진실할지라도 진짜는 아니다. 평론이라는 깐깐한 껍질속에 들어앉은 ‘진짜배기’ 속살은 제법 달다. 

물론 그 속살을 창작과 비견하게 끌어올린 것은 무수한 언어의 조탁이다. 군데군데 깜짝 놀랄 부분들이 있다. 다감한 시인에게 빠진 평론가가 다정증이라 천명한 그의 병환에 대해 한마디한다. “그는 낫지 마라.”(「문태준」, p39) 비문의 위태로움이 짧은 평론의 방점이 돼 찍혔다. “읽을 때마다 눈물을 참아야 하는 구절. 건강한 내가 아픈 그녀를 적셔주는 게 아니라 그 반대지. 지독해”(「시인의 직업은 문병」, p138)라고 말할때는 소설을 읽는 것 같고, “임제 선사(禪師), 이렇게 일갈하시니 우리의 쑥스러운 카네이션이 고개를 툭 꺾는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5월은 쑥스러운 달」, p237)라고 할땐 리드미컬한 음성이 들린다.

게다가 전작에 비해 짧은 호흡은 몽매한 독자에게 고맙다. 한 인터넷서점에서 작품을 추천하며 신 간사님이 “왜 이렇게 긴 글을 썼냐는 물음에, 짧게 쓸 시간이 없었노라고 대답한 지혜로운 작가가 누구였”는지 기억을 더듬은 적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분명 “짧게 쓰는 데 성공”한다. 짧은 수다들은 더 알고 싶게 근질어주는 구석이 있다. 좋은 책이 잔뜩 꽂혀있는 서점처럼 나는 책을 들었다, 한 권을 내려놓았다, 두권을 들었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네, 알겠습니다. 간사님. 이제 좋은 책 많이 읽을께요”라고 말한다. 어디선가 문학이 그에게 빚을 졌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참 그렇다.

결結

이 책을 읽을 때 종종 손을 멈췄다. 책을 읽는 대신 시집을 몇 권 샀다. 아껴읽고 싶었다. 속에 담긴 모든 작품을 다 읽어본 뒤 함께 얘기하고 싶었다. 계속 품고만 다니다, 결국 어린애처럼 못버티고 봉지 속에 손을 몇 번인가 낼름낼름 넣었더니, 어느새 다 읽어버렸다. 책 속에서 문예가와 문학가들이 서로 친하다. 무대 뒤에서 나누는 배우들의 수다를 엿본 관객처럼 애가 탄다.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끼어들고 싶다가도 형국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내 스스로 문학의 바깥 동네에 있는 사람인 것이 서글퍼진다. 아직도 바람만 든 채 나이를 먹고 있는데, 그네들이 나누는 말이 궁금해 견딜수가 없다. 그래, 치열하게 읽고 쓰고 살아야지, 라고 스스로를 한 번 더 주워섬긴다. 『느낌의 공동체』를 그런 길목에 앉아 읽었다. 이 축복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