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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웃고 있지만 슬픈, 슬퍼하지만 웃긴, 『이원식씨의 타격폼』


이원식씨의타격폼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박상 (이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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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막무가내다. 되든 말든 웃겨보려고 부단히 개그를 치는 주변의 누군가를 기억하게 한다. 아무려나 싶게 쓰인 단어며 문장, 상황이 눈치 없다 싶을 정도로 열성이다. (심지어 첫 문단 여백이 없는 책의 편집까지 ‘들이댐’을 닮았다.) 그 우스운 진지함은 워낙 진심으로 웃겨서 도저히 흘려 웃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무엇인가를 절절하게 애정하는 사람만이 이 경지를 만들 수 있다. 가령, 「이원식 씨의 타격 폼」에 등장하는 한 부박한 야구선수를 보자. 비루먹은 포즈가 유일한 장기로 돌변해버리는 폭소의 상황은 오직 그가 야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의 “가지고 있는 시詩 다 내놔”라거나 “제발 시 좀 읽어라! 이 대가리에 똥만 든 새끼들아!”(p210)라는 외침은 반드시 절박한 표정으로 읽어야 한다. 난처하게도, 어찌나 웃긴가!

 

그런데 이 상황이 진정으로 웃긴 것은, 사실 슬프기 때문이다. 야구, 시詩, 락rock부터 삶, 연애, 생활까지 여기저기에 걸친 작가의 단편들은 이원식 씨의 포즈와 닮아있다. 우습지만 그 안에는 안쓰러운 실패가 있고, 더 안쪽에는 포기 안 된 애정이 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아서,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들은 자주 실패할 것이고, 언제나 우스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아무려나함은 공허한 유희가 아니라 숙성된 슬픔에 가깝다. 그것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우리 앞에 실재한 문제적 상황일 때는 더욱 그렇다. “당신같이 돈이 없는 인간은 죽어버려야 해. 숭고함을 더럽히고 있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야”(p26)라고 내뱉는 일그러진 사회에 대한 응시가 소설을 이룬다.

 

이 웃긴 슬픔은 종내 무엇이 되는가. 웃고 있지만, 실은 울고 싶은 상황을 요샛말로 ‘웃-프다’고 하던가. 그의 글은 ‘웃-퍼서’ 무엇보다 위로가 되고, 이내 감정의 전환을 가져오며 건강함이 된다. ‘웃고 있지만 슬픈’ 그의 글은 다양한 변주 속에서 ‘슬퍼하지만 웃기’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웃-픈’에서 ‘슬-기’로의 재정비는 다시 한 번 세상에 대항할 수 있게 하는 현명한 자세다. 나는 소설 속의 그들과 함께 슬-기로워, 말라비틀어진 가슴에 축복처럼 소주를 흘려 넣고, 추울 때는 복도에서 개다리 춤을 추고, 돈 천원에게도 밥벌이에게도 우주에게도 위협받지 않을 것이며, 그리하여 10만 번 스윙을 해서 핼리혜성에 닿을 것을 것이다. 장관이다.

 

부기. 라디오 문장의 소리를 들었다. 박상, 김중혁 작가의 목소리는 그들의 글과 닮았다 싶다. 소설도, 목소리도 사람 자체가 아니건만, 언젠가부터 내가 아는 것만 같은 그들을 자꾸만 만나고 싶어 애가 탄다. 그들(의 소설)이 어떤 사람인가하면, 세상의 공멸에 같이 앉아있으면서도 너스레를 떠는 목소리들. 이를테면 “야야, 괜찮아. 술이나 한 잔 하자”의 육화. 바닥을 긍정한 채, 제일 마지막까지 는적는적해 ‘줄’ 사람들이다. 그들은 절망에 도망하지 않는다. 설령 다 같이 망해버려도 옆에서 끝까지 웃어줄 그들의 유머는 하, 하, 하, 하고 등짝을 힘 있게 두드려준다. 그런 누군가의 앞에 내가 앉아 있다면, 함께 남아 “괜찮아”의 개그를 겨루고 싶다. 더러 유머의 불발탄들의 사이에서 그들이 가진 슬픔의 기미를 본 것만 같고, 어쩌면 이 사람들은 그 본래의 순간엔 혼자 소주잔을 기울일 것 같아서이다. 아니라면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