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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독서단상4. 『달의 바다』 외


1. 꿈에 살지 않아도 괜찮아, 어쩌면 진짜로, 『달의 바다』

달의바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정한아 (문학동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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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달을 밟지 못했을 때 행복하기를 멈추었는가. 우리는 꿈에 닿지 않았을 때 살아가기를 멈추겠는가. 책은 너무나도 선량한 “아니야, 괜찮아”의 글이다. 그런데, 이루지 못했고 나아진 것이 없는데도 괜찮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변변찮은 말인가. “환상이 현실을 압도할 때도 있다”는 성석제 작가의 평을 빌리자. 고모의 편지는 (소설 속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다시 한 번, 작가의 글은 (소설 밖에서) 현실을 압도한 환상이며, 거짓이다. 가령 이런 부분들. 고모의 비밀을 알고 나서,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할 수 없을 것”을 깨달은 나는 알약을 버린다. 그리고 갈비를 굽는다. 민이는 남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는가의 고민을 풀지 않은 상태로 희망차게 수술을 결심한다. 설령 앞으로의 여정이 각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해도, 이건 너무 착하다. 어느 순간 둘러보니 절로 날이 밝은 당혹감. 그럼에도 이 소설의 기꺼움은 시간과 경험의 모든 에너지를 온기로 전환해 낸 오롯함에 있겠다. 누군가는 시인의 직업이 위문이 아닌가 물었는데, 소설가도 마찬가지였었던가. 꿈에 살지 않아도 괜찮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이 위문慰文은 어쩌면 거짓말. 그래도, 한결 나아졌다.


2. 더디게 밝는 달밤만큼 네 울음이 깊구나, 『달을 먹다』
 
달을먹다(제13회문학동네소설상수상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진규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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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살문 가장자리를 꼼꼼하게 둘러 바른 문풍지가 밤새 울면서 떨었다. (중략) 삽사리는 언제나 지나치게
잘 짖어 탈이었지만, 말 앞에서만은 제 성질을 다독일 줄 알았다. (중략) 시간이 묘시에서 진시로 월경했
고, 메마른 푸른빛은 그즈음에서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p9)


첫 한 문단만 짚어도 허투루 쓴 글이 아니다. 단어를 고르고, 인물을 얽고, 상황을 여미는 능력이 넉넉하다. 여성적 섬세함으로 일치된 문체 덕분에 계속 인물 간 시점을 교차해도 위화감이 없다. 일말의 번거로움보다는 인물들의 속내를 두루 짚어주는 여낙낙한 작가의 배려가 반갑다. 내용은 결국에는 오장이 끊어지는 사랑이고, 그래왔듯 연의 엇갈림인데, 조금도 진부하다 여겨지지 않는 것은 드물게 깊은 속울음 때문이다. “오라버니를 보자마자 나는 그냥 울었다. 울 수밖에 없었다.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너로 인해 죽겠구나.”(p156), “오라버니가 끝내 나를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이다.”(p157) 같은 처연한 문장들은 마음을 새살스레 풀어해치지 않는다. 절제한 대화와 감정의 묘사가 시절과 안타까이 맞아떨어지며, 그 속앓이가 깊다.


3. 그 불사하던 시간을 기억하시나요, 『새는』, 『피리부는 사나이』

새는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박현욱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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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부는사나이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기홍 (문학동네,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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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작품이 너무 환상적이라고 느껴지면, 단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불사하던 시간을 이미 너무 멀리까지 흘려버렸기 때문일까. 그 시절 날 것의 기운은 도대체 얼마만 했단 말인가. 한 편은 그 에너지를 기타에서, 독서, 공부로 옮겨갔고, 다른 한 편은 진실을 찾는 데 쓴다. 『새는』은 별 볼일 없는 고등학생의 ‘로망’이다. 오로지 한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손에 잡는 것마다 박수를 받으니 이 얼마나 “짜잔!”한 환상인가. 『피리부는 사나이』 역시, 환상이다. 치기어린 사유와 피리 부는 사나이의 사건이 섞여 현실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부표한다.

그럼에도 책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글이 단순한 환상에 멈추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실패다. 처음에도, 나중에도 주인공들은 자신의 ‘단 하나’를 구하지 못한다. 덕분에 누군가를 향한 희구는 사실 오롯하게 자신만을 바꿔놓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아무것도 아닌’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으로 몸부림쳐 나가는 여정의 거리가, 어렴풋하지만, 그 언젠가의 순수한 성장을 기억케한다.


4. 나는 나의 기억으로 이루어졌는가, 『언노운』, 『사슴벌레 여자』

언노운
카테고리 소설 > 프랑스소설
지은이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문학동네,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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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여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윤대녕 (이룸,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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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기억 그 자체인가. 기억에 부정당해 나를 잃어가는 남자와, 기억을 심어 나를 만들려던 남자가 있다. 『언노운』과 『사슴벌레 여자』다. 길지 않은 두 소설은 처음 몇 장만 넘겨도 알 수 있듯, 설정 자체가 굉장히 강렬하다. 두 작품은 한 편은 아주 스펙터클하고 빠르게, 다른 한 편은 감상적이고 천천히 ‘기억에 따른 나의 존재 증명’이라는 의문을 풀어나간다. 전자는 그 속도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연이은 실패가 거의 책의 전반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체 흐름보다는 그 비슷비슷한 굴곡에서 주인공의 미묘한 심경변화-스스로에 대한 의심의 순간 같은-를 짚어내는 것이 더 재미있다. 『사슴벌레 여자』는 작가의 많은 글이 그랬듯, 상황보다 더욱 글을 압도하는 멜랑콜리한 심상과 묘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겠다. 기억은 생필품과 같다며, 정체성으로부터 애써 도망치는 이미지가 낯설고 쓸쓸하다. 다만 두 작품 다 그 독특한 설정과 충실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 애초의 질문에 깊숙이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5. 신난다, 어른, 입을 여십니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황만근은이렇게말했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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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의마지막4.5초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성석제 (강,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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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리듬이 짙어, 글에 대한 평은 대체로 명확하게 떨어진다. 이야기꾼의 입담, 신명나는 놀이, 새로운 문체, 감각적 언술. 축축한 누기가 없다거나, 뒷맛이 개운하다는 말도 좋았다. 이 중 어떤 설명이라도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니 간단하게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집들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다채로운 인간군상인데, 그들을 숨 쉬게 하는 비기는 '안다'의 태도다. 모호하거나 의뭉한 인물은 좀처럼 없다. 글은 신랄한 혹평이나 정성스러운 위문, 혹은 몰락적 상황을 통해 은근하게 인물에 윤리적 잣대를 대본다. 그래서 이야기는 건강하고 쾌하다. 서사 자체도 혼란 없이 길을 알고 내닫는데다, 유머마저 '안다'의 맥락에서 이뤄진다. 그의 농담은 의뭉스러운 시치미보다는, '이러이러하니 저러저러하다'며 뜬금없이 터지는 잡담의 기지에 있다. 그러니 이것은 유쾌한 어른의 글이다. 찡긋해 보이는 그의 눈 맞춤에, 마음이 든든하니 가볍다.


 

6. 여자인 모든 우리가 부르는 노래, 『끝나지 않는 노래』

 

끝나지않는노래최진영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최진영 (한겨레출판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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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우직함과 진부함에 위태롭게 걸쳐있다. 두자로부터 쌍둥이, 쌍둥이가 낳은 아이들의 이야기. 글은 전후부터 현대까지 세대를 이어 내려온 지난한 여성들의 삶이다. 가난, 일, 시어머니, 남편, 무지, 속박- 어디선가 들어본 부딪침을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모은 듯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써야만 했다면, 언저리에서 끄집어낸 그 모든 결핍을 한데 누빔질 해 가운데 펼치고 싶은 욕심이었겠다. 글에서는 오직 그러한 일상만이 도드라진다. 시대 상황은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네들에게는 빨래만도 한 끼 밥만도 중요하지 않다. 

 

눈에 채는 장치가 하나 있다. 중간중간 들어간 고시원의 상황이다. 이야기의 순환과 비극성을 위해서라고는 해도, 강도와 화재가 얽어진 이 부분은 다소 과장된 설정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 번 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넣어야만 했다면, 여인들의 부박함이 실은 이만큼 절박한 위기였다고 소리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세대가 이어진다. 가까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노래도 이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여자'는 그 모든 결핍한 사람들의 또다른 종명種名이다. 소설은 설령 다른 것을 모두 내려놓고서라도 이들만을 위해 투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