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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소설로 태어나기 전, 그 위태로운 자취, 『뱀』


뱀윤보인소설집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윤보인 (문학과지성사,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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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이자 책의 첫 작품인 「뱀」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여지없이 마지막, 질 속에서 키우던 뱀을 보는 순간이다. 뱀이 삼킨 반지, 그 뱀이 똬리 튼 내 질. “여기에 숨어 있었다니.” 인물의 행동을 천천히 좇다 느닷없이 맞닥뜨린 이 이미지는, 그 뒤의 모든 단편들과 어떤 비정상적인데서 오는 이물감을 공유한다. 「악취」부터는 본격적이다. 악취에 집착하는 나. 작가는 마이너한 감정을 집요하게 그려내는 데, 그 시선은 동의를 구하기보다 일반에 배타적인, 꼬부장한 눈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야. 내 선택이고 자유야.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제각각 쓰레기들이 있지. 더러운 찌꺼기들. (중략) 토해내지 마. 악몽이 아니야. 흐느끼지 마.” (p48~49)

그런데 「줄」, 「일요일」로 이어지는 작품 속의 이런 사념들은 ‘인간의 욕망’으로 화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독특한 인물들을 얽어낸 앞뒤의 전말, 즉 ‘왜’라는 설득의 과정이 아주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너절한 충동이라고 불러야 할, 근원모를 위태로운 형국만이 흩어져있다.

결국 남는 것은 이야기라기보다 이미지들이다. 비릿한 냄새와 혐오어린 웃음, 불유쾌한 어지러움 같은. 작가는 이 회화적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 언어의 기능도 달리 사용하곤 한다. 소설의 정체성을 ‘이야기’에 둔다면, 책의 어떤 부분들은 소설로 태어나기도 전인 말들의 나열이다. 설명하지 않고, 불안한 색감의 단어들을 그저 나열하는 것은 꽤나 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줄」은 어쩌면 「일요일」을 위해 태어난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과일의 색상이 무척 마음에 든다. 하얀 사과, 검은 바나나, 파란 수박, 갈색 포도. 과일의 색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p89


우리는 교활한 어린이. 방탕한 어린이. 무지한 어린이. 아부하는 어린이. 유쾌한 어린이. 지껄이는 어린이.
혐오하는 어린이. 순진한 척하는 어린이. 똑똑한 척하는 어린이. 괴로워하는 어린이. 좌절하는 어린이.
멸시하는 어린이. 욕하는 어린이. 허영심 많은 어린이. 구박받는 어린이. 중독에 빠진 어린이. 난폭한 어린이.
전율하는 어린이. 불길함과 내통하는 어린이. 비트는 어린이. 저항하는 어린이. 사나운 어린이. 퇴폐적인 어린이.
정신 나간 어린이. 미친 어린이. 그야말로 미친 어린이. p100~101


그래서 그나마 전통적인 소설의 외관을 하고 있는 중편 「바실리 사원」, 「살풀이 춤」과 단편 「꼽추의 장례식」의 소재가 ‘비언어적’ 예술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작가 스스로 자신을 변辯한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고 물어보자. 왜 이야기로는 안 됐을까. 이렇게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정직하게 느껴지더군요.”(p164) 이렇게 언어 이전의 것들은 책에 등장하는 얼마 안 되는 긍정어다. 그것들은 괴로움을 힘으로 바꾸고(「꼽추의 장례식」), 아무리 슬퍼 보여도 환희를 품어낸다(「살풀이 춤」).

그러니까, 『뱀』이라는 이름의 비언어적 소설집은 작가의 그림이자, 마임이고 살풀이다. 이 설명되지 않은 이물감들은 세계를 향한 작가 나름의 정직한 사위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을 던져보자. 작품에서 예술은 종내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이 위태로운 사념들은 무엇을 알 게 하는가. 질문의 답을 구할 때까지, 이 글은 “언어가 지워진 자리에 또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지만, 결국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p164) 외로움의 고리에서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