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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적敵, 그 자본주의들, 『자본주의와 그 적들』


자본주의와그적들좌파사상가17인이말하는오늘의자본주의
카테고리 정치/사회 > 정치/외교
지은이 사샤 릴리 (돌베개,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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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자본주의에서 산다”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누군가가, 간단한 입문서를 통해 마르크스를 가까스로 알았다면, 그 다음 순서로 이 책은 그리 나쁘지 않다. 역사 혹은 학문의 영역으로 석화 돼 간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실은 아주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각 사상가들의 생각이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 다양한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 좌파나 마르크스 사상은-역사상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어서인지-나에게는 마치 악보만 바라보는 것처럼 보다 실제적인 소리에 갈증 나게 만드는데, 그런 면에서 17명의 서로 다른 말을 듣는 작업은 제법 흥미로운 것이었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내용이 명확하게 구획되어 있지는 않다. 주로 현 자본주의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과 그로부터 발생한 문제점을 짚거나(제1장, 제2장, 제3장, 제8장, 제10장 등), 이 상황 속에서 좌파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제4장, 제5장 외, 생태주의·아나키즘·포스트모더니즘 등 다양한 주제로 뻗어나가더라도 결국 전반적인 뉘앙스는 같다)를 다루는데 집중하고 있다. 문제에만 귀결되기 때문에 사샤 릴리가 서론에서 밝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다양한 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좌파의 과제를 한층 더 분명히 가다듬자”는 애초의 목적은 다소 소홀해진 듯하다. 책은 『자본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위풍당당한 제목대로 ‘그 적들의 면면을 살펴보자’가 아니라, ‘자본주의는 진짜로 우리 적이야’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약간 소극적인 원제, 『Capital And Its Discontents』이 차라리 적합해 보인다.)

 

어쨌든 인물과 사상이 워낙 넓은 범위에 걸쳐져 있는 만큼, 짚어보면 생각할 만 한 거리는 많다. 가령, 2차 대전 이후 제시된 ‘인간적인 자본주의’는 실현 가능했을까, 민족자본주의의 형성에서 계획경제는 사회주의 하 계획경제와 어떻게 다른가, 노동의 사회화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어떤 식으로 노동의 연대가 어려워졌는가, 또는 생태주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서 각각 어떤 식으로 소외됐는가 등등. 방대하고 산발적인 내용을 모두 좇으려 하기보다, 어느 주제든지 초점을 맞춰 고민하면 남을 것이 있겠다. (*본 글은 세미나의 후기를 겸해 쓰고 있는데, 적어도 나는 내용 전반을 살피는 데 급급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다만, 책이 각 인물에 대한 대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포된 위험성에 대한 주의가 필요해 보인다. 각 장章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예를 들면 제13장이나 14장이 그런 느낌을 주는데,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아나키즘 등에 대한 대담자의 견해는 일종의 피해의식이라 여겨질 만큼 완고하다. 또, 상품화에 대한 제이슨 무어와 어슐러 휴즈의 견해도 각 장에서 보는 것보다 교차적으로 확인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입문서가 가진 다양한 역할 중에, 어떤 내용의 정리보다는, 일단 관심을 환기시키고 가능한 다양한 사상을 던지는 데 의미를 둔 듯하다. 그 키워드를 손에 넣고 분석 혹은 평가를 통해, 좌파 사상의 얼개를 잡아 나가는 것은 (‘부지런한’) 독자들이 차후 이행해야 하는 문제다.

 

이 방대하고 어쩌면 우왕좌왕한 대담집은, “후기 자본주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조직화는 말 그대로 막연한 환상에 머물고 있다”(p10)는 서두의 방증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록 조직화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후기 자본주의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존재들은 막연한 환상에 머물지 않고 실재함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 증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에서 산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나, 마르크스에 관심을 갖게 됬다는 것은, 17명의 저명하다는 사상가들도 풀지 못한 과제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