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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몸의 언어로 각색한 원시적 건강함, 「템페스트」




201112월 23(금) 오후 8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연출 오태석  원작 셰익스피어 
극단 목화


막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이거다, 싶은 공연이 있다. 오태석의 「템페스트」가 그렇다. 태풍이 몰아쳐 배가 난파되는 다이내믹한 이 첫 장면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무대가 또 있을까. 암전. 북소리가 극의 시작을 알린다. 막이 오른다. 파도의 부서짐보다 더 희뿌연 무대. 잔뜩 고인 스모그가 흘러나와 관객들을 몽환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전무前無한 무대 장치라니. 무대 위에는 배우 외에, ‘아무것도 없다’.

『연극적 상상력』의 저자 로버트 에드먼드 존스는 “연기만 훌륭하면 장치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것이다”라고 했었나. 이 말에 의구심이 든다면 조금 수정을 해도 좋겠다. 장치 없이도, 훌륭한 극은 ‘몸 장치’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배우들이 춤을 춘다. 한삼 자락이 나부낀다. 파란 조명아래 배우들은 난파선의 일행이 되고, 파도가 되고, 아수라장이 된다. 붉은 조명. 이번엔 화마火魔다. 연출은 독특함을 넘어, 인간과 재난을 스펙터클하게 ‘일체’시킨다.

이러한 오태석의 「템페스트」는 ‘몸의 연극’이라 칭할 만하다. 몸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대사, 노래, 춤, 동작-의 표현에서, 연출은 현명하고 배우들은 단련됐다. 시간의 변화가 필요하면 몸을 시계바늘처럼 돌리고, 질지왕(프로스페로)의 도술은 뜬금없는 웨이브와 물구나무서기로 코믹하게 표현된다. 걸음과 몸짓도 마당극이나 한국무용을 보는 듯 날래다.

특히 사투리와 옛 말투를 적절히 섞은 대사는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운율감을 살려 각색됐는데, 덕분에 리듬감이 극 전반에 안착돼있다. 이런 대사는 곧바로 노래가 되고, 춤이 되고, 축제가 된다. 서사와 볼거리가 끊임없이 교차되면서, 암전 없이도 장면은 잘 구획돼 있고, 넘나듦이 유연하다. 질지왕의 도술, 허재비들의 춤, 혼인 장면, 제웅(에어리얼)이 자비마립간(알론소) 일행을 홀리는 장면(호랑이 등장과 열탕 지옥)등이 다채롭다.

오태석 극의 ‘몸’은, 환상적이기 보단 원초적이고 전통적인 것이다. 갈등의 화해, 불가능한 사건과 낭만적 사랑이 엮인 대표적 희비극인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 말년 작으로, 기본적으로도 달관의 긍정이 돋보인다. 그렇게 무대에 오른 수많은 극 중에도 특히, 극단 목화의 것이 “가장 가볍고, 밝고, 순수하게 유쾌한 템페스트”(Neil Cooper)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그 원시성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미란다와 오태석의 아지를 비교해 볼 때 이런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빠, 태풍을 잠재워 줘요. 저 죽음의 바람 이제 멈춰요” (뮤지컬 「태풍」 중 ‘바다를 잠재워줘요’)라고 여린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아름다운 여인은 무대에 없다. “그만 좀 해유”라며 질지왕(프로스페로)의 심술을 따지고, 세자(페르디난드)를 만나 천진하게 좋아하는 아지(미란다)는, 무릎에 앉혀 때를 벗기고 달래, 연지곤지를 찍어줄만한 개구지고 어린 소녀다. “바람, 비, 이슬은 네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걸 가르쳐 줘. 힘들면 기다려. 바람 불어온다”고 소박히 말하는 두 사람의 연애는 곱다.

이 원시적 건강함이 공연의 궁극적 도달점, 유토피아다. 배우들이 북과 꽹과리, 바라, 징을 울린다. 축제다. 군주 자리를 뺏기고 무인도로 쫓겨난 질지왕의 복수극이 용서로 바뀌고, 아지와 세자의 혼인을 천명한다. 극의 마지막. 질지왕이 겸손한 인사와 함께, 도술을 일으키는 부채를 객석에 건넨다. 「한 여름밤의 꿈」의 퍽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하나의 꿈夢을 꾼 것처럼 그저 즐거이 기억해달라는 셰익스피어적 환상과는 달리, 오태석의 꿈望은 바람이다. 흥겨운 몸의 움직임을 타고 관용과 화해의 유토피아는 객석까지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