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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소통불능자를 연기하는 관객맹신자, 「변두리 극장」




2012년 1월 22(일오후 4시
게릴라극장
연출 오동식  원작 카를 발렌틴 
배역 이승헌, 홍민수, 김철영, 배미향

남다르다. 극 10분전부터 공연장 문을 열어놓고 관객을 들인다. “올해 목표가 뭐에요? 다이어트라고?” 묻다가, 어정어정 신문을 펴든다. “13억을 받았대. 안 많아 보여요?” 실수도 천연하다. “거기 좀 비켜줘요. 우리 조명 오퍼(레이터)가 못 올라갔어요.” 이쯤 되면, 거의 ‘관객의 간을 보는’ 수준이다. 웃을 준비가 됐나,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됐나. 아니라면 물론, 끝내 준비시킬 사람들이다. “그, 왜 신문만 읽으면 숙연해지나.” 관객 일동, 웃음.

우연히 티켓을 얻은 부부의 대화를 시작으로, 연극은 ‘변두리극장’의 리허설과 공연 사이사이 단막극을 집어넣었다. 리허설 직전 지휘자 욕하기, 서로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부부의 싸움, 커튼이 고장 난 공연, 출판사 직원의 전화 돌리기, 부인에게 오해받는 공연……. 대략 이런 식이다. 무대 위에서 변변한 스토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없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정상적인 소통의 부재. 아들에게 외출한다고 남기는 쪽지가 이렇다. “아들아. 우리, 집 나간다”, “근데, 어감이 좀 이상하지 않아?” 또, 지휘자의 말은 지지리도 못 알아먹는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쉬자고요?” 지휘자가 음악을 멈췄는데도 연주를 계속한다. “왜 안 끊어요?” “저 안 틀렸어요.” 인물들은 서로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다.

상황이 주는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카를 발렌틴을 번역한 정민영 교수(한국외대‧독일어과)의 해설을 참고하는 것도 좋겠다. “파국으로 이루어진 발렌틴의 희극성은 불완전과 결핍, 부정성, 그리고 추함(Hässlichkeit)의 희극성과 연결된다. (중략) 그의 ‘추함’은 악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 소외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웃긴 무대는, 불완전하고 추레한, ‘소통불능자’들의 회장이다. 이곳에서 무대 뒷면의 낙서(“이 세상은 누구 소유의 것이냐”)가 던지는 물음을 좇아, 본래 발렌틴 극이 가지곤 했던 사회비판적 성향을 찾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전쟁에 관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한 편을 제외하면, 시야를 좁혀 각개 인간 사이의 불균형을 찾는 게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볼 만 한 것은 텍스트 자체보다, 이 엇나간 상황들 사이에 쑤셔넣은 수많은 연극적 장치들이다. 연희단거리패의 대사 구현과 움직임은 언제나처럼 탁월하고, 특히 배우 이승헌은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지휘도 인상적이지만, 그가 등장한 첫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할 만하다. 광대 분장 너머로도 압도 되는 눈빛과 얼굴 주름을 가진 이 배우는 두 명분의 연기를 거뜬히 해낸다. 옷걸이에 걸린 코트에 한 쪽 팔을 집어넣더니, 마임이다. 관객이 제 3의 인물을 보지 않으면 무너져버리는, 1인 마임극치고는 꽤 긴 장면. 이 시간 속에서 배우와 관객의 소통은 드물게 견고해진다.

이번 공연에서 배우들은 손수 악기를 익혔다. 당연하게도, 관객에게 매끄러운 곡을 들려주고 싶어서는 아니다. 상황을 자연스럽게 ‘궁극의 추함’으로 모셔가는 것이 목적이겠다. ‘Nessun Dorma’, ‘Habanera’, ‘불타는 사랑’을 공연 할 때마다 상황은 엉망이 되고, 드디어 마지막 곡에서는 온 무대가 무너진다. 박수를 치기에도 어안이 벙벙한 난장판. 호쾌하다. 타깃을 잃고 빗나간 소통어들이 얽어진 끝에 벌어지는 재건불능의 파괴라.

이런 카타르시스를 일전에도 봤다. 「방바닥 긁는 남자」의 마지막과 닮았다. 불완전하게 쌓아놓고 이내 무너뜨려 공연을 마무리 짓는, 세상에 대한 자학적 쾌감을 얻고 생각할 거리를 더 이상 무대 위에는 남겨두지 않는. 연희단거리패의 이 방식을 언젠가 ‘파괴극’이라고 명명해도 좋지 않을까.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믿고 이렇게 언어의, 난장판의 실험을 할 수가 있을까. 아마 관객 역시 이 실험에 동참하고 기꺼워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관객을 믿는다는 것은, 물론, ‘자신 있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