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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이것은 절대로 운명이 아닙니다, 「가면과 거울: 오레스테이아 ver.1.3」




2011
년 12월 7(토오후 7
서울대학교 두레문예관 

인문대학 공연예술학 협동과정  

과거 그것은 운명이었다. 아비가 딸을 죽이고, 아내는 남편을 죽이고, 아들이 어미를 죽이는.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을 다룬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의 오랜 고전을, 극은 젊은 눈동자로 직시하고 있다. 그 젊음이 단순히 현대적 변주에 그쳤다면 분명 따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전의 재현자는, 충실하게 이야기에 뿌리박고 있되, 옛 세계관을 살해하고 다시 태어났다. 죽이고 죽이는 사건 속에서, 그들이 칼을 들고 묻는다. 진짜로 운명인가. 물음은 '이 가문에 아교처럼 엉겨있는 재앙'만큼이나 집요하다.

대각선으로 길이 나 있다. 어둠 속에 도드라진 그 직선은, 배우의 동선이자, 인물간의 거리距離, 운명에의 길, 죄를 팔밀이한 흔적, 긴장감의 끈이다. 무대를 장악하는 그 직선형의 이미지가 팽팽하다. 객석 앞으로 기웃 놓여진 대각, 그 끝에서 끝으로의 부르짖음에, 관객들은 이내 분노의 정가운데로 들어선다. 그러나 무대는 경직되어있지 않은 채, 자유롭다. 가로지르는 걸음들이 매 장면에 동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런웨이의 모델처럼, 배우들이 걷고 멈춘다. 특히 단련된 코러스의 움직임은 공연의 호흡 그 자체다.


그 긴장 속에서 답을 더듬어보자. 극의 어느 대사들은 서로 동류항이다. "남편은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게 다 네 운명 때문이다 아들아" 같은, 그리고 "나는 아가멤논입니다"는 선명宣明까지. 그 인간이기 때문에, 너이기 때문에, 아가멤논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숙명을 말할 때 만큼은 누구도 부르짖지 않는다. 
 

이 비극에서 이질적인 순간은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의 만남이다. 엘렉트라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닌다. 그녀는 어쩌면 웃는 것 같다. 선택을 종용하는 시퍼런 눈이다. "누나는 다 준비됐는데 이제 어쩔 거야?" 동일 인물이 연기한 이피게네이아의 이미지도 이에 겹쳐진다. 거부하고, 요구한다. "저에게 입 맞춰 주세요. 그거라도 추억으로 간직하게요. 제 말이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다면요." 때론 진실의 담지자를 도맡는 코러스의 대사를 읊어도 좋겠다. "운명이 아닙니다. 가풍입니다." 이런식으로, 고전은 과거를 부정하여 현전한다. 그러니까, 답은 나왔다. 운명이 아니다, 이것은 광기다.

극의 마지막이 섬짓하다. 인물들이 박수를 치는 관객을 비웃는다. "여태 구경만했으면서." 조금 더 극성스럽게 밀어붙여서, 여기서 연출의 글 일부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나는 무력합니다.
 

             예술 따위, 엿이나 먹어라. 엄마가 차려주신 밥상, 죽어가는 어린 소녀, 탄핵, FTA, 그리고 삼천년 전 그리스의 이야기.
            그 어떤 것에도 나는 무력합니다. (중략) 대체 인간은 무엇하는 존재입니까?
  
 

인간은 무엇하는 존재인가. 많은 극에서 그러하듯 배우들의 가면은 종종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어쩔 수 없다 끄덕이는 우리에게 극은 적어도,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그대는 운명을 살 것인가, 살지 않을 것인가. That is the ques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