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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미디어가 말한 메디아, 메디아로 말한 미디어, 「메디아 온 미디어」

 



2012
년 8월 4(토) 오후 3
게릴라 극장
연출 김현탁 극작 유리피데스
극단 성북동비둘기


보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오랜 명제다. 하나의 사건은 프리즘을 지나 포장되거나 폭로되고, 변주되며, 편의에 따라 분노·연민·공감·이질 사이를 오갈 수 있다. 보이는 것은 조종된 가상이다. 이 사실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경험되어, 라캉과 지젝, 푸코를 읽지 않아도 쉽게 짐작 가능한 말이 됐다.

 

그리고 여기 희대의 악녀가 있다. 애인을 위해 동생을 죽인 여자, 남편을 위해 정적을 죽인 여자, 복수를 위해 자식을 죽인 여자. 이 복잡 미묘한 광기는 어떻게 다루기에도 탐탁지 않다. 보이는 어떤 것도 진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어떠한 진실인 척’도 하지 않는 것이 그녀를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극은 다각의 채널을 한 자리에 올려버린다. 연극 「메디아 온 미디어」를 이루는 것은 매체가 투과시킨 10개의 절편이다.

 

첫 장면은 기자회견장이다. 이혼의 심경을 말하는 메디아의 목소리는 아주 정교하게 가식적이다. 기자들의 아우성과 뒷말, 명사의 계산된 동작과 장식적 문구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이 클리셰는 오히려 새로워 보인다. 한 장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음의 신파극을 보자. 비애를 못 이기고 쓰러지는 여인과 매몰찬 시아버지가 나누는 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대화. 수사가 현란하다. 남편 이아손과의 느와르 풍 대치, 애니메이션 녹음으로 표현돼 싱코페이션이 유려한 자식 살해, 사이비 종교 회합으로 묘사돼 에스닉하고 코믹한 아이게우스와의 섹스까지. 수많은 톤을 오가는 배우들의 역량과 함께, 연극은 아주 흥미롭게 정신없다.

 

이 화려한 기법 속에서 극이 유일하게 포기한 것이 있는데, 바로 메디아의 진실, 진실한 메디아다. 연극은 기자회견을 마친 여자의 뒷모습이나, 꾸며진 울음 이면의 속내를, 자식을 살해한 어미의 오열을 전혀 담지 않았다. 이들은 (‘어떤 하나’일 뿐인) 진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애초부터 추구한 리얼리즘 역시 없다. 그러니 이 극의 감상법은 인물과의 동화同化라던가, 사건의 논박에 있지 않다. 연극은 내용이 아닌 방법에 관한 것이다. 극은 이렇게, 무난한 「메디아」가 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피해, 「메디아 온 미디어」가 되며, 더 나아가서는 매체media를 본격적으로 고민한 「미디어 온 메디아」가 된다.

 

이런 작업이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은 오직 예술이 대항하는 것과 동화됨으로써만 대항할 수 있다”(『미학이론』)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이를 ‘텅 빈’ 매체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은 실재의 폭로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온전히 대중매체를 향한 힐난이라고 보기에는 아쉽다. 방점을 찍을 곳은 다른 데 있다. 매체의 허상이 꼬집힌 부위보다 더 도드라지는 것은, 그 꼬집는 행위 자체-매체를 빌려 도전한 다채로운 형식-다.

 

보자. 관객이 앉아있는 곳은 TV 앞이며, 방청석, 영화관의 외피를 한 ‘객석’이다. 그들은 과장되고 분절된 연출을 통해, 장면과 거리를 두고 앉아있다. 막과 막 사이는 암전 없이 이루어져 있는데, 시침을 뗀 채 옷을 갈아입고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행위로 극의 절단면이 더욱 부각된다. 이 때의 관객은, 시청자이되 매체를 통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예지적 시청자’이고, 방청객이되 호응 요청을 낯설어해도 좋은 ‘동화되지 않은 방청객’이며, 영화 관객이되 분무기로 비를 뿌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는 제작 메커니즘을 보고 있는 ‘자유로운 시선의 관객’이다.

 

이렇게, 대중매체를 차용했지만, 결코 대중매체적이지 않은 극의 이질성은 아주 경쾌하다. 제목의 ‘미디어media’는 일차적으로는 매스미디어가 되겠지만, 사실 ‘연극이라는 매개체media’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은 그 매개물로서의 연극과, 연극의 관객에 관한 재치있는 탐구다. 이로부터, 타 매체와 동일한 관음적 시선이, 연극에서는 어떻게 뒷걸음질치고, 능동적이 되는지 짐작케 된다.

 

마지막 순간은 기억에 남겠다. 도대체가 헐벗은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절절한 엔카 ‘흐르는 강물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을 립싱크하며 커튼콜을 마친 배우들은 기어이 무대를 범죄 현장으로 꾸미고야 퇴장한다. 끝까지 우리는 테두리 바깥에 서있다.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 오직 이 낯선 가면들이 투각한 연극의 재기발랄함만이 분명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