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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애들 장난이 아닌 바로 우리의 무엇, 「아일랜드」

 



2013
년 2월 12(화) 오후 8
게릴라 극장
연출 서지혜 극작 아돌 후가드
최무인, 남동진


오랜 친구와 밤이 짧도록 수다를 떨었다.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연애도 여행도 잡다한 사건들도 허다했을 텐데, 그만 어떤 부정들에 대해 가장 열심히 얘기하고 말았다. 사회 초년생의 적응이란 이런 것이었다. 편법과 융통의 아슬아슬한 경계들을 배우기. 이제 온전히 정당할 수 있는 것은 좁은 자취방 안에서만 가능한 듯, 우리는 모처럼 정성을 다해 분개했다. 그러나 말미에 내린 결론은 참담한 것이었다. 아등바등 잘 끼여 살기란 벌써부터 지치지만, 그렇지 않게 살기란 더욱 난감하다는 사실. 나에게는 그 순간 스치는 얼굴들이 있었는데, 장애물이 있건 말건 직각 반듯이 걸어 다니는 모 만화의 교수님 같은, 진지하거나 올바른 얼굴들이 그랬다. 이젠 그런 표정의 삶이란, 어쩌면 슬픈 것을 지나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은 아닐까.

 
「아일랜드」의 표정은 그렇게나 복잡한 것이었다. 「안티고네」 비극의 현대판 주석註釋인 극은, 감옥에서의 연극 상연을 통해 고전비극을 희극에 융합시키고, 다시 이를 현대비극으로 전환시킨다. 연회에 「안티고네」를 올리기로 한 두 죄수가 있다. 억울하게 끌려온 존과 윈스톤의 상황은, 테베의 것과 비견하기엔 국가의 야만을 지나치게 부각하지만, 법에 대립한 개인을 그린 명고전의 좋은 부기가 된다. 그런데 윈스톤은 안티고네 역이 탐탁찮다.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괴팍하게도, 극은 인물이 거부한 것을 구태여 이뤄낸다. 「안티고네」를 연기하는 막 장에서 윈스톤의 여장은 우습고, 얼어있는 그의 말투는 세찬 대사와 이질감을 빚어 더욱 웃기다. 비극의 희극적 상연. 왜 그렇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묘한 촌극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장면을 떠올려야겠다. 연습 중 “애들 장난은 안 한다”며 토라진 윈스톤. 갑자기 존이 광분한다. “애들 장난이라니.” 어떻게 이 소중한 것들을 함부로 ‘장난’이라 폄할 수 있는가. 그것은 권력이 한 일이다. 정의와 자유, 삶과 행위를 두고 그들이 한 말이다. 법의 귀가 없다면, 비극은 더 이상 비극일 수 없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우스갯거리일 뿐이다. 이를 알고 있으니, 비극의 희극적 표현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극은 덧붙인다. “처음엔 웃겠지. 그게 어떠니? 나중엔 경청하게 될 텐데. 그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거야. 끝에 가서는 듣는다고!” 대사는 극의 최후와 공명한다. 안티고네가 떠듬떠듬 정의를 말하자 왕은 도발한다. “애들 장난.” 그때 터진 그녀의 격렬한 분노. 연극은 이 에너지로 희극을 다시 비극으로 전복시킨다. 이 순간이 바로 「아일랜드」의 정면이다.

 
아돌 후가드의 희곡은 늘 윤리적으로 촘촘하다. 말들은 군데군데에서 계속 지엽적인 실랑이를 벌인다. 가령, 안티고네의 유무죄를 시비하는 대화가 그렇다. 윈스톤, 우린 뭘 따지자는 게 아냐. 우리는 그 여자가 무죄라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유죄야. / 아냐, 존! 안티고네는 무죄야. / 작품 속에서는… / 작품 같은 건 꺼지라고 해! ‘무고한-죄인’들의 이 대사는 옳고 그름이 과연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또 다른 장면을 보자. 3개월 뒤 출소를 선고받고 기뻐하는 존에게, 윈스톤이 내뱉고야 마는 단어 ‘악취 나는-자유’는 신랄하다. 이는 점점 주체를 잃어감을 두려워하는 종신형 죄수의 부러움 어린 단말마기도 하지만, 자유를 악취나지 않게 살아가는 것 역시 쉽지 않음을 경고하는 소리기도 하다. 삶을 사는 데에는 그 쉬운 타협 하나가 없다.

 
여전히 나는 잘 끼여 살기에 지쳐있고, 그렇지 않게 살기란 더욱 난감하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무력함과 올바름의 패키지는 헛헛하다. 연극조차 그러한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극은 우리의 공허했던 분개만큼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죄수들의 공연이 그들의 억울함에 일말의 변화라도 주었단 말인가. 때문에 누군가들에게 이것은 그저 여가요, 장난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적어도 한 가지 가능성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놀이가 그저 놀이로 끝나지 않고, 웃음이 다만 웃음으로 끝나지 않은 채 어떤 파토스로 남을 수 있다는 것. 충분하다. 우스꽝스러울 줄을 알고 위험할 것을 짐작하면서도 연극을 마친 죄수들의 머리 위로 모래가 축복처럼 쏟아진다. 쓰러질듯 서 있던 애초의 모래밭은 이제 발을 굴러 춤추는 남아공의 축제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