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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오레스테스야, 나는 아직 할 말이 있다, 「오레스테스 3부작」

 

 

2013년 6월 14(금) 오후 8
게릴라 극장
예술감독 이윤택 극작 아이스퀼로스
연희단거리패


한 선생님께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들어 “영웅에 초점 맞춘 비감이 오히려 살해된 개개인의 고통을 쉽게 잊히도록 했다”고 평했을 때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몇 번이고 눈이 붓도록 우는 것으로 그들의 재앙을 공유했다고 믿은 나로서는, 그때 용해돼버린 무엇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가볍게 망각하고 나서야, 곧 말라버릴 따뜻한 눈물의 위험함을 알겠다. 비극 속에도 선의가 있었다고 내뱉는 순간 우리는 비극 자체를 보기를 멈춘다. 그곳에도 화해의 여지가 있지 않았냐고 묻는 순간, 우리는 도저히 봉합되지 않을 상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이제 시대는, 삶에 필요한 능력으로 망각을 꼽았던 니체를 등지고, 피해자가 마땅히 갖아야 할 권리로서의 원한ressentiment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원한을 대체 어찌할 것인가. 「오레스테스 3부작」은 원한으로 얽힌 가문의 일화다. 아비가 딸을 죽이고, 아내는 지아비를 죽이며(1부, 아가멤논), 아들이 어미를 죽이는(2부,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지독한 상잔은 어떤 현자도 시비를 가릴 수 없어 아테나의 재판에 이르러야 끝을 맺는다(3부, 자비로운 여신들). 고대 그리스에서 극이 하려던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듯하다. 민중들에게 로고스의 우위를 천명하기. 희곡은 자칫하면 단순한 복수의 연쇄로 읽힐 수 있지만, 실은 논쟁 속에서 본성과 이성, 자연법과 실정법 같은 두 축의 가치가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각주:1] 어미를 죽인 오레스테스에게 여신이 던진 무죄의 흰 돌은 원한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바로 ‘법률’의 증표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에게 닥친 재앙에의 대처를 법과 이성으로 해결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여신의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까지 극은 대립의 양상을 선명하게 그린다. 대치되는 입장은 종종 신구新舊[각주:2]의 이미지로 전환되어 있는데 3막에서 늙은 여신들의 만담에 가까운 툴툴거림과, 하얀 정장을 입은 아폴론의 랩이 그러한 대비다. 이런 장치들 덕분에, 장면들이 일관되지 못한 채 돌출된 부분도 있지만, 4시간에 가까운 극임에도 좀체 늘어지지 않는다. 극을 풍부하게 만든 요소 중에는 코러스의 사용을 들 수도 있겠다. 공연은 노래로 상황을 묘사하거나 비판하는 코러스의 본래적 형식을 위트 있게 살려놨는데, 가령 1막에서 기타 연주는 반주 뿐 아니라, 말 달리는 소리나 분위기를 전환하는 배경음으로 유연하게 활용된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이미지를 통해 균형을 잡는 중에서도 연극은 하나의 주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극단만의 해석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라는 인물의 구현에 주목해보자. 수많은 클리타임네스트라 중 이렇게 분노가 도드라진 경우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이 페르소나가 정부와 손잡고 남편을 죽이는 배신의 상징이었다면, 김소희의 연기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광기다. 아가멤논의 살해 순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피 묻은 몸으로 걸어 나올 때의 표정은 계획에 성공한자의 것이 아닌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격분을 가진 자의 것이다. 3막 중 벽면에서 튀어나온 살해당한 어미의 얼굴 역시 원한의 강렬한 현현이 된다. 뿐만 아니다. 오랜 전쟁에 대한 탄식, 망자를 위한 굿, 여신들의 불만 그 모두에게서 각자의 고유한 원한은 세밀하게 묘사된다. 특히 무녀의 이미지를 잘 살린 배보람의 독특한 카산드라는, 고저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목소리와 광기어린 몸짓이 발군이다.

 

이런 식으로 원한을 통해 극을 읽을 때 마지막 판결은 어딘지 씁쓸하다.[각주:3] 오레스테스는 사면되고, 그가 짊어졌던 제 어미의 원한은 무화된다. 복수의 여신들은 자비로운 여신이 되었으며,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된다. 문제는, 사건 종결이 선포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희생자들의 상처다. 한 시인은 오늘날 차마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없다고 했던가. 더러는 법적 판결로, 대의와 효율 때문에, 혹은 집단적 해결이나 단순한 무관심에 의해 손쉽게 망각되고 망각을 요구받는 개개인의 상처는 얼마나 많은가. 원한을 없애는 것은 집단을 위해 인류가 해결해야만했던 과제였겠지만, 아테나의 무표정한 흰 돌에서 나는 해피엔딩이 아닌 어떤 공포를 읽는다. 봉합될 수 없는 상처는 억지로 다물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어 차라리 다음 숨을 위한 허파로 쓰이는 것이 아닌가. 

 

 

  1. 자연본성과 이성의 대립은 사실 많은 그리스 서사의 중심 주제다. 「오레스테스 3부작」에서 살해의 이유로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이 원한을 어찌할 수 없음’을 말한다면, 아가멤논과 오레스테스는 각종 당위를 먼저 고민한다. 이것은 「안티고네」에서 각각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상태와 유사한 것이다. 한편, 아도르노가 해석했듯,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섬에서 섬으로 나아가며 여정을 진행하는 과정은 자연본성을 이기고 인류가 계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여러 서사시와 비극은 파토스와 로고스의 대립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하나로 엮이는데, 오레스테스는 말하자면 친모살해의 섬에 발 묶여 괴로워하는 오디세우스이며, 판정승한 크레온이다. [본문으로]
  2. 우리극 연구소의 20주년 기념공연으로 오른 이번 극에는 20기 배우들과 기존 배우들이 함께 했다. 클리타임네스트라(김소희) 대 오레스테스(이재현)·엘렉트라(김아영), 복수의 여신(김미숙) 대 아폴론(임현준)과 등 양극단의 입장은 각각 신구 배우들이 나눠 맡았는데, 연기의 숙련도와 발성의 차이가 도드라져 다소의 위화감을 준다. 그러나 한 집단이 세대를 거듭해 내려오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극 외적으로도 흥미로운 일이거니와, 숙련된 배우들이 주변을 끌고가는 힘을 볼 수 있는 기회기도 하다. 가령, 2막에서 엘렉트라가 코러스 장(김미숙)과의 호흡을 나눌수록 점점 선이 분명한 연기를 하는 것이 그러하다. [본문으로]
  3. 극은 현자들의 역할을 관객에게 돌린다. 모든 관객에게 각자 검은 돌과 흰 돌을 선택하게 하여 유무죄를 직접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다수의 관객들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복수의 여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은, 이 연극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고여 있는 어떤 감정을 시사한다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시도임에도, 구태여 다시 돌 개수를 서로 같게 조정하여 기존 희랍 비극의 결말을 고스란히 재현해내는 것이 어쩐지 하려던 말을 다시 접는 듯한 느낌을 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