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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Out

쓰레기라는 숭고한 대상

 어떤 높은 분의 말만큼 창조가 단순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적어도 쓰레기를 창조해낼 수는 있다.  내가 “쓰레기가 있으라” 하심에 쓰레기가 있으니, 봉지에 넣고 묶어 추운 날 슬리퍼를 끌고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에 투척해야 하는 제거의 노고에 비하면, 이 창조는 얼마나 손쉬운 것인가. 쓰레기는 ‘마술적’으로 탄생한다. 사물은 당신이 그것의 불필요함을 천명하는 그 순간에 쓰레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쓰레기의 창조 이면에는 더 정확하고 주목할 만한 진실이 적혀있다. 실은 “모든 창조가 쓰레기를 수반한다.” 창조는 목적과 그 목적을 위한 설계도를 전제하기 때문에, 창조의 과정에서는 언제나 남는 것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설계도의 어느 자리에도 명시되어있지 않은 잉여, 그것이 바로 쓰레기가 아닌가. 지금 당장 당신의 방을 둘러보시라. 깨끗해지기 위해서 어떤 사물엔가는 쓰레기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테니. 우리는 질서를 위해 질서 바깥의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말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추려내야만 한다. 그러한 작업이 없으면 창조도 없기 때문에, “쓰레기는 신성한 존재인 동시에 사악한 존재인 것이다. 쓰레기는 모든 창조의 산파인 동시에 극히 가공할만한 장애물이다. 쓰레기는 숭고하다.”(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새물결, 50쪽) 그대, 쓰레기를 가벼이 보지 말지어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쯤 해서 쓰레기의 쓰레기-됨이 쓰레기 제 탓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숭고의 근거는 “(대상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판단력비판』, §23)던 칸트의 말은 여기에 적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쓰레기는 자신의 내재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자기 외부의 이념에 근거해서 발생한다. 이 사실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가장 주요한 창조주가 나나 당신이 아니라, 거의 통제불능의 상태에 가깝게 외연을 넓혀가고 있는 다른 ‘무엇’이라는 현실 때문이다. 그 앞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의지와 사유, 어떠한 개인사나 사연에도 상관없이 인간쓰레기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 혹자는 저 창조주의 자리에 현대화라던가 국가, 이성, 자본주의, 더러는 우리의 창조경제주를 위치시키고 그들의 설계도에 대한 세심한 논박을 펼치기도 하겠으나, 여기서는 다만 쓰레기가-된-인간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한 고민을 수년전의 한 무대에서 봤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연극 좀 봤다는 사람 중에 <원전유서>(작 김지훈, 연출 이윤택, 2008년 초연)를 언급하지 않고 쓰레기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근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한, 무대 위의 압도적인 쓰레기 더미. (그것이 5t트럭 3대 분량이었다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그 쓰레기 산에서 “지구상의 모든 방법과 정답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살고 다. 전기도 주소도 권리도 세금도 없으며, 보편적 윤리와 상식적 감정마저 없는 이 인간들을 보라. 치매 노파들은 소년을 어미라 부르고, 미친 사내는 돌을 씹어 밥을 대신하고, 상갓집에서 허기를 채우는 아이는 사람들이 더 많이 죽으라고 빈다. 이곳에서는 약자를 향한 이유 없는 폭력에도 모두들 손을 놓고 있으며, 맞아죽은 자식의 주검 앞에서 어미가 분개하지 않는다. 무대 위는 정상에서 벗어난 인간들, 인간쓰레기들의 하치장이다.

 

 그리고 그곳에 남전이라는 인물이 있다. “쓰레기 더미를 땅으로 바꿀 것”이라고, 그리하여 “여기서 본래의 인간을 끌어올릴 것”이라고 외치는 저항적인 인간 남전. 그는 쓰레기 산에 주소를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한다. 행정구역에 편입됨으로써 저 폐기물에 인간이 살고 있음을 알리고, 저들이 버림받은 쓰레기가 아니라 사회 속의 인간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쓰레기 산에 지번이 생긴 뒤, 극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기발하다. 폐휴대폰에서 금을 채굴할 수 있게 되자, 남전이 나눠주는 땅문서를 받으러 사람들이 몰려든다. 호객꾼과 거간꾼이 등장하고, 쓰레기 땅에 대한 권리문서가 거래되고, 암시장에 나돌고, 값이 올라, 결국 쓰레기가 귀해진다. 군중들이 쓰레기를 다투고, 쓰레기를 빼앗고, 악다구니 속에 쓰레기 산이 사라진다!


 남전은 실패했다. 사건은 인간의 탐욕을 확인하는 한갓 소동으로 끝난 채, 본래 쓰레기 산에 살던 인간쓰레기들은 다시 동그마니 버려졌다. 어쩌면 저들의 구원은 인간쓰레기를 사회 속에 기입하는 방식으로는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쓰레기가 된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는 이해받을 수도 구제받을 수도 없는 유형의 인물들은 아니었을까. 기실 재활용될 수 있는 한 그것은 자원이지 ‘진짜’ 쓰레기가 아니지 않은가. ‘진짜’ 쓰레기는, 설계도가 변하지 않는 한 쓸모의 바깥쪽에 놓인 채 영구히 쌓이고 방치될 것이다. 그러니 쓰레기를 쓸모 있게 만드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먼저 경계 그 자체에 대해 묻는 것이다. 더럽건 더럽지 않건 쓸모 있건 없건 간에, 국가나 사회의 그 어떤 기준과도 관계없이, “인간이 존재한 모든 자리는 지상이므로.”


 그래서 연극은 남전의 반대편에 어진네를 두었다. 그녀는 굶고 맞고 자식이 죽는 모든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불모의 땅에 호미질을 계속한다. 그저 살아갈 것. 누군가는 저 쓰레기 산에서 일어난 혁명의 실패가 안타깝고, 다분히 신화적이고 희생적인 결말이 탐탁찮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런 아쉬움의 자리에 남전의 깨달음을 얹어둔다. “이 혼돈과 파괴의 세상 한 귀퉁이에서 누군가는 혁명을 꿈꾸고 누군가는 텃밭을 일군다 그런 인생도 훌륭하고 이런 인생도 훌륭하다 (…) 한 인간이 작은 밭을 일구는 호미질 이 조그만 일도 위대하다 흙이다! 이게 땅이다 내가 딛고 있는 곳 언제나 가장 낮은 곳 여기가 흙이구나”(『원전유서』, 지만지, 265~266쪽)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존재에 대한 그 압도적 증명 속에서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세상에는 오직 자신만이 자신의 창조주인,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의 구분이 없는, 포함-배제의 게임이 적용되지 않는 그런 영역도 있는 법이다.

 

『플랫폼』49호(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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