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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Out

지금, 『대학신문』입니다.

올해 초 방한한 극작가 하타사와 세이고의 회고는 기억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대지진 이후, 그는 변변찮은 시설과 인력 속에서, 무엇보다도 그 엄청난 무력감 속에서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지금 연극이란 말인가.”


나는 이것과 비슷한 원초의 물음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신문사 생활 중 우리를 지치게 만든 것은 어쩌면 과도한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2011년의 힘듦은 조금 더 맥없는 것으로, 고질적인 기자 부족이나 구독률에 대한 회의, 그야말로 정체된 정체성에 대한 물음 등이 그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노심초사로 얽어낸 텍스트가 소용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면, 끝내 우리는 자문해야 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지금 『대학신문』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 철없이, 한창 학생운동과 학내언론의 위상이 높았다던 1980년의 ‘한 때’를 부러워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선 의문을 미처 해결하기도 전에, 우리가 ‘절대로 해야 할 것’은 여전히 산적해 있었습니다. 편집장이 되고 첫 신문은 호외였습니다. 2011년 5월 30일의 비상총회와 본부점거. 나는 2천명이 모인 아크로의 숨 막히는 벅참과, 막 나온 신문을 한 부씩 나눠줄 때의 기분을, 몇 날이고 본부와 신문사에서 번을 서던 기자들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안팎으로 위태롭던 때였습니다. 속수무책으로 법인화가 진행되어가는 중에, 동맹휴업과 총학선거는 무산되고, 학생사회가 죽어간다는 탄식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외침이 공허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상도동 철거와 삼성 산재, 강정해군기지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로 희망버스가 결성되던 때였습니다. 우리의 기사가 힘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도무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 거개는 술자리의 화두로 남거나, 회의를 길게 만들기만 한 채 결론 없이 끝났지만, 진정성을 위한 지난한 논쟁 역시 ‘절대로 해야 할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1952년 창간 이래 지난 60년이란 시간동안 시시로 결은 달리 했지만, 우리는 아마도 이런 식으로, 본질이 같은 싸움을 이어온 듯합니다. 나는 그 본질이란 것이 매장당한 진실을 세상에 석방하려는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독자의 자리에 앉아서, 부족했던 고민과 못 다한 할 말을 그저 속에다 부려놓다가, 그 진실에의 의지야말로 의무인 동시에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생각도 해보곤 합니다.


앞서 언급한 하타사와 세이고의 나머지 말이 기억납니다. 무력해서,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고. 2012년에는 수많은 언론사들이 파업했습니다. 그런 때입니다. 대안 없는 정리해고로 사람이 죽고, 정의를 말하면 감옥에 가며, 무수한 부정이 웃으며 칼을 휘두르는, 진실이 억압받고 연대를 필요로 하는 때. 이렇게나 해야 할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도대체 왜 지금 『대학신문』이 아닐 수 있단 말입니까.

 

 

『대학신문』 영인본, 60주년 기념 회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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