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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Out

분노하라, 그러나 정확하게


1. 이미, 분노사회

 

당신은 분명 분노했으리라.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들에, 자신의 무력함에, 윤리가 부재한 사회에, 그럼에도 이 모양인 정치에 대해. 그도 아니라면, 어쩌면 연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도무지 날 뽑지 않는 면접관이라던가, 끊임없이 날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분노했을지도 모르겠다. 삶이 팍팍하다. 기민한 누군가는 이미 이곳을 ‘분노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말대로 “나와 세계의 관계가 부조화하다는 느낌”이, 그리하여 “삶이란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기분”이 분노를 낳는다면, 세상에, 오늘날 분노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연극은 그러한 삶에서 제 표정을 배웠다. 5‧18민주화항쟁, 후쿠시마 원전사고, 위안부 문제 등 소재 자체로 시대의 공분을 다루는 작품은 올해도 꾸준하고, 개인적 불안을 말하는 작품에서도 서사를 절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대체로 분노의 격렬함이었다. 어떤 고전은 그런 분위기에 따라 인상을 바꾸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오레스테스 3부작」(게릴라극장, 2013.6.6~6.30)에서 클리타임네스트라(김소희 분)의 이미지를 들 수 있겠다. 정부와 손잡고 남편을 죽인 이 여인이 그동안 권력욕 가득한 요부나 복수의 쾌감에 사로잡힌 악녀로 표현됐다면, 오늘날 그녀는 딸을 잃은 어미가 터뜨리는 분노의 현현이다. 남편을 죽여서도 해소되지 않고, 아들에게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분노의 얼굴이 장막을 찢고 나오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이곳에 분노는 얼마나 가득한가.

 

2. 그러나 분노하라, 정확하게


유행처럼 만연한 분노의 감정을 바라보자니, 작년에 타계하신 한 어른의 말이 다소 의심스럽게 떠올랐다. “분노하라”던 그 뜨겁고 정엄한 명령(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대체 어떤 이유로 더 이상의 분노가 필요하단 말인가. 지금의 너덜해진 마음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것 같아서, 나는 그만 이렇게 대꾸하고 싶어졌다. “선생님, 그 구호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에게 분노는 이미 너무나 많아서요.” 그러나 저 말이 분노 신드롬을 낳을 정도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것이라면, 나는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분노가 부적절한 세계에 대한 ‘반응’이며 지난한 삶에 대한 ‘감정’이라면, 애초부터 그것은 동사, 그것도 명령형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저 어른이 시대에 요청한 ‘분노’가 분노사회의 그것과 다른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물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이에 대한 유용한 통찰을 제시한다. 분노의 의미를 갖는 단어인 튀모스(thymos, 기개‧격정‧분노)는 그에게 영혼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개념인데,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혼은 마부와 두 필의 말에 비유된다. 마부는 사유하는 이성을, 검은 말은 쾌락만을 좇는 욕구를, 흰 말은 명예를 사랑하는 기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중 흰 말의 역할은 마부의 지시를 잘 듣지 않는 검은 말을 자제시켜 제 갈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오히려 흰 말이 검은 말과 함께 제멋대로 날뛰는 경우가 있어 문제가 된다. 즉, 플라톤에게 분노는 이성과 협력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고귀하고 정의로운 분노와 사납고 야만적인 분노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당연히, 전자다.


결국 분노하는 인간, 호모 이라쿤두스(homo iracundus)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민하고, 현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며,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정당한지 생각하는,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인간이다. 다시 말해 분노(indignation)란 인간의 존엄성(dignity)이 침해받았음을 감지하는 밝은 눈이며, 뜨거운 마음이다. 그것의 목표는 증오가 아닌 연대에, 폭력이 아닌 평화에, 감정의 분출이 아닌 아픔에 대한 상기에 있다. 지금 우리의 흰 말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 ‘분노’라는 위태로운 단어를 써야만 하는 절박함은 우리에게 그러한 분노가 부재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3. 줄리어스 시저, 실패한 분노의 군상들


얼마 전 한 연극에서 읽은 이미지는 그러한 상황에 정면으로 향해 있었다. 「줄리어스 시저」(명동예술극장, 2014.5.21~2014.6.15)의 장면들은, 비록 연출이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몇 번의 위기를 거치는 동안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 사회의 모습과 겹쳐져 불편해지는 것이었다. 이 연극은 결과물은 자신들의 감정에 묻혀 ‘제대로 분노’하는데 실패한 군상들이다.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연극의 역동성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지만, 거칠고 사나운 인물들의 대사에서 당위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느 인물의 분노에도 이입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 모든 인물은 정의를 말하지만, 극 중 단 한 사람도 정의롭지 못하다.


연극의 이러한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은, 시저 살해의 시비를 가리려 군중 앞에 선 브루터스(윤상화 분)와 안토니(박호산 분)의 연설 장면이다. 무대 위에는 휠체어에 실린 시저의 시체와 브루터스, 격노한 시민들이 서 있다. “시저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시저를 죽였다”는 저 유명한 대사가 끝나자마자, 군중은 브루터스를 연호한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안토니의 연설. 시저가 늘 빈자를 위해 울었으며, 시민들에게 재산을 나눠줄 것을 유지로 남겼다는 증언 후에 공분은 곧바로 시저를 죽인 이들에게 향한다. 부화뇌동이다. 야유와 환호를 거듭하며 고성을 지르는 군중의 에너지는 단연 압도적이지만, 그들 모두는 무대를 둘러싼 철망 바깥쪽에 존재할 뿐이다. 이는 어느 누구도 사태의 핵심에는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의 적절한 시각화가 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왜 브루터스에게서도 비극성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비이성적인 군중과는 달리, 그는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자신의 이상인 공화정을 고민하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앞서 플라톤은 분노를 말하며 이성만을 말했지만, 이제 한 가지를 보충해야 할 것 같다. 스피노자가 “분노란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정서”라고 할 때, 그는 타인의 존재를 분명하게 명시한다. 중요한 것은 시저라는 한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데 있던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결국 브루터스가 안토니에게 밀려날 뿐 아니라,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채 우유부단 했던 것은 그런 이유다.

 

4.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다.”


하나의 작품이 실패한 인물들을 다룰 때, 비슷한 시기의 다른 작품이 같은 희곡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끄집어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로운 지점이 될 것이다. 타비아니 형제의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Caesar Must Die, 2012)는 로마 교도소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상연하는 죄수들의 이야기다. 실제 재소자들의 열연, 현실과 극을 정교하게 접붙이는 편집, 서사와 자유롭게 공명하는 공간 사용 등은 과연 거장의 것이구나 싶다. 여기서는 연극에서와 달리 진정성 있게 읽히는 브루터스의 표정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할 듯하다.


이런 장면이다. “그의 가슴을 찢지 않고 폭군의 마음을 없앨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연습을 하던 브루터스 역의 배우(살바토레 스트리아노 분)가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한다. “왜 그래? 배신, 살인 이런 거 다들 익숙하잖아.” 동료의 물음에 주저하다 그가 꺼낸 말은, 살인을 앞두고 있던 친구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갑자기 내 앞에 서더니 브루터스처럼 말했어요. 말한 건 달랐지만 뜻은 똑같았죠. 동네 사람들이 그걸 듣고 허풍선이라면서 다들 말했어요. 나도 같이 놀려댔죠. 그게 마음이 아파요.” 그 순간 한껏 클로즈업 된 그의 표정. 그는 브루터스가 됨으로써 드디어 친구를 이해하게 됐고, 친구를 이해함으로써 브루터스를 납득할 수 있게 됐다. 영화의 분위기에는 과거의 무게와 타인에 대한 기억이 조심스럽게 얽어져있다. 그제야 “시저, 이제 편히 쉬시오. 당신을 죽였던 분노보다 더한 분노로 자결하니” 같은 브루터스의 대사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은 줄지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간 죄수의 말,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군.” 이 말은 물론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도 읽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은 연극의 가면을 씀으로써 타인과 연결되었고, 그때서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과 처해있는 상황을 직면하게 된 것은 아닐지. 나는 지금 고결한 분노를 위한 예술교육을 주창했던 플라톤처럼, 저 영화의 교훈이 예술에 의한 재소자들의 교화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좋은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타인과 깊이 연결되며, 그러한 공감과 연민을 통해 그들 각자의 적절한 방식으로 분노한다. 찬란한 소설을 쓰겠다던 소설가가 무엇엔가 힘에 밀려 5‧18을 썼을 때, 일본 연출가가 위안부 소재의 연극을 상연할 때, 혹은 작가가 노동운동에 대한 웹툰을 그릴 때, 그들은 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종신형의 세계에서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다.” 이것은 안티고네의 말. 나의 동력 역시 타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있다. 우리의 구호는 “분노하라”가 아닌 “사랑하라” 혹은 “공감하라, 행동하라, 세상을 바꿔라”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저 단어가 가진 끓어오름의 심상이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정확하게 분노하자. 타인이 홀로 아프지 않게 보다 빨리 공감하고, 쉽게 봉합될 수 없는 그 상처에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것. 더 늦기 전에 분노하고, 더 늦게까지 분노하자. 세월호에, 밀양에, 쌍용에, 강정에, 그곳에 사람이 있는 한, 그러한 구호는 끝까지 외쳐져야만 한다.



『플랫폼』46호(2014년 7,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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