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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얼마나 무서웠을까"라는 잊혀졌던 말, 「트로이의 여인들」

 

 

2013년 7월 27(토) 오후 7시 반
게릴라 극장
예술감독 윤광진 극작 에우리피데스

용인대학교 뮤지컬연극학과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현실과 유리돼버릴까 걱정했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본다. 삶을 해석하기 위한 도구를 공부하다 삶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연극이론을 공부하다가 막상 무대와는 멀어지지 않을까하는 고민들. 지금 와서는 우습도록 성급한 그 물음은 실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결국 서로 연결돼있었다. 가령, 『예외상태』를 읽고 나면 이집트 군부의 쿠데타 소식을 듣게 되고, 『호모사케르』를 읽고 나면 난민수용소에 갇혔던 김인수씨의 인터뷰를 보게 되는 식으로.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는데, 현실에서 그러했듯 책에서도 해답을 구할 수 없었으며, 책에서 그러했듯 현실에서도 나는 무력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근엔 어디서나 습관처럼 물어야 했다. 나는 이 것들로, 이 사실들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연극 역시 그 강박적 물음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연극이 보여준 흥미로운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공연 내내 어떤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왜 하필 그리스 비극이었을까. 익숙하지 않은 이름들과 무거운 말투가 산재한, 그 중에서도 비극 전반의 흐름을 알지 못하면 자잘한 대화들을 쫓아가기 불편한 「트로이의 여인들」이라니. 극은 “너희 뭐해?”라고 물으며 과거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오프닝이나, 스파르타쿠스를 연상시키는 군무, 제의적 표현, 무엇보다 중간 중간 삽입된 돌출적인 노래 덕분에 새로워 ‘보인다.’ 그러나 서사의 측면에서라면, 트로이의 여인들과 위안부 문제를 연결시킨 아이다 카릭의 연출[각주:1]만 떠올려 봐도, 큰 변주 없이 고전을 정직하게 고증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왜 이런 방식이었을까.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의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가장 직접적으로는 절망이라는 단 한 장의 이미지를 들 수 있겠다. 극은 사건의 흐름이 아닌, 절망의 집요한 묘사다. 짧은 경력에 비해서 몸 쓰임과 발성이 단련돼있던 배우들은 트로이의 멸망을 표현할 때는 몸으로 무너지고, 장례식에서는 팔을 앞으로 뻗으며 몸으로 흐느낀다. 여인의 목소리라기보다 자식 잃은 어미의 동물성聲에 가까운 헤카베(김인선)의 이미지는 극 전체의 토대가 되고, 그 와중에서도 타이밍 좋게 얻어맞거나 하는 병사 콤비(이홍배, 조용진)의 움직임은 자칫 처질 수 있는 극을 살린다. 긴장과 폭발을 맺고 푸는 카산드라(김재원)의 연기는 특히 기억에 남을 만하다. 무대 위에서, 피에 물든 트로이의 여인은 운명의 결박이라는 붉은 천에 묶여 수 갈래로 잡아당겨진다. 여인들은 제 한 몸을 지탱할 수 없으며,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비명과 탄성뿐이다.[각주:2]

 

그런데 이 절망의 허리를 몇 번 씩 부러뜨려놓는 장치가 있다. 극을 과거의 한 이미지에서 오늘로 연결시키는 힘은 막간 음악에 있다. 악장(권오성)은 생뚱맞은 가사를 가볍게 부르며 비극을 휘젓는데, 가사는 대략 이런 식이다. “서울대에 들어갔더니 운동권에 가버린 누나”라거나 엄마와 이모의 씁쓸한 상황들, “오늘의 행복을 믿지 말라”는 탄식과 “역사는 돌고 돈다”는 한숨. 결국 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절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 약자들의 울음이 오늘날에도 그치질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한 번만 더 끈질기게 묻자. 그 반복이란 것을 말한다는 게 무엇을 알게 하는가. 대체 새로울 것이 없다. 존재의 되풀이는 새로운 것의 부재이며, 반복은 종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연극이 하는 것이 그 뿐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자, 나는 비극을 보는데 조금 지쳐버렸다.

 

그 순간에 들려온 한 마디를 나는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얼마나 무서웠겠어?”란 말. 극의 마지막에서 배우들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곳에서 내 강박적 물음의 시작점, 가장 단순해서 금세 잊혀졌던 처음을 기억해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을까.” 대단한 무엇을 하려 들기 이전에 선행돼야 했던 것은 그저 삶의 표정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트로이의 여인들」의 정직한 고증은 과거 인물들의 감정의 결에 가능한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시도이며, 젊은 배우와 스텝들의 솔직함이 효과적으로 발휘된 지점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나는 그들이 별 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이 극이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반복되어 박제된 사건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소박한 해답은, 결국 연민이며 공감이다.

 

 

  1. 「트로이의 여인들」,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2007.11.14.~2007.12.2 [본문으로]
  2. 설령 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 그것뿐이라 하더라도, 인물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그렸으면 싶다. 헤카베나 안드로마케가 왜 그 수모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했는지에 대한 답은 오늘날에도 필요할 것이다. 또, 거대한 흐름에 휘둘리는 개인의 비극에 초점을 맞췄다면, 헬레나 역시 고르기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팜므파탈의 이미지보다 비극성 쪽으로 중심을 더 옮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