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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비극으로부터 정신병원의 탄생, 「리어왕」

 

2013년 10월 9(수) 오후 3시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연출 스즈키 타다시 극작 셰익스피어

도가 스즈키 컴퍼니

 

1. 비극, 리어

 

단지 비참했기 때문에 희곡 「리어왕」은 오랫동안 문제작이었다. 리어왕은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에 저항하지 않아 숭고하지 못했으며, 안티고네처럼 절명을 감수하지 않아 비장하지 못했다. 그뿐인가. 판도라의 상자가 인류의 모든 악덕을 뱉어내고 밑바닥에 남긴 것이 알고보니 ‘비참함’이었던 것 마냥, 셰익스피어는 하다못해 오셀로의 열등감도, 맥베스의 야망도 그에게 쥐어주지 않았다. 그의 어리석음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어서, 그의 불행에는 마땅한 당위가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한 문학가는 “작품의 결말을 다시 읽을 자신이 없다”[각주:1]고 고백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본질적으로 상연 할 수 없는 작품”[각주:2]이라고 토로했던 것이다. 이 상연 불가능한 인간 리어를 어떠한 여과 없이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도대체 우리는 저 늙은 아비를 직시하는 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괴롭게도, 스즈키 타다시 연출의 연극 「리어왕」에서 우리는 그 지극한 비참의 모범적 형상화를 고스라니 목도해야만 했다. 연극의 첫 장면을 보자. 헨델의 「라르고」가 조용히 흘러나오는 무대 위로 예닐곱 칸의 미닫이문이 놓여있다. 서서히 걸어 나와 칸칸이 자리하는 인물들, 바로 머리 위로 떨어지며 짙은 명암을 드리우는 조명, 그리고 순간 정면을 바라보기. 이들의 무게감 있는 등장 한가운데 휠체어에 의지한 그가 있다. 모든 인물들이 중세 귀족 혹은 일본 무사계급의 섬세한 의상을 걸치고 있을 때, 왕은 극의 시작부터 홀로 헐벗었다. 평화롭고 정중한 음악마저 그의 몰골에 대비되어 오히려 체념과 무상을 상기시키는 장식이 된다.

 

왜 무대는 저 왕에게 극 초반 잠깐의 위엄도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 연출은 이런 대사에 밑줄을 그었는지도 모르겠다. "오, 하늘이여, 미치지 않도록 해주소서! 평정을 주소서. 미칠 마음 없나이다."(1막 5장) 앞으로의 지독한 비극을 위하여 그의 기도는 실패되어야만 한다. 리어는 미칠 운명이다. 그것을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까. 광인이 아니면 리어의 역할을 버틸 수 없으며, 환상이 아니면 이 불행은 견딜 수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무대는 정신병원이며 저 비참한 남자는 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2. 비극의 무대는 병원이다.

 

무대 배경을 정신병원으로 설정하고 등장인물의 구성물로서 고전을 상연하는 것은 본래 연출가의 오랜 방식이었다.[각주:3] 이번 공연 역시 그러한데, 늙은 노인의 옆에 앉아 책을 읽는 현대 복장의 간호사는 이 연극의 본 배경을 말해준다. 그녀는 남자가 괴롭게 버둥거릴 때 딴청을 피우거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날카롭게 웃는다. 극 후반에서는 미닫이 문 안쪽으로 한 무리의 간호사들이 종종거리며 달려가기도 한다. 비극의 이미지 정중앙에서 시종 눈에 밟히는 이런 이질감은 이 이야기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비극을 마음 놓고 직시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실이 아니기에 극은 더욱 비참해 질 수 있다. 2막으로 구성되어 있는 연극은 리어왕과 딸들, 글로스터와 아들들을 병치시키는 뼈대만 남기고 본래 희곡의 많은 부분을 잘라냈다. 왕의 곁을 지켜야 할 켄트 백작은 아예 극에서 사라졌으며, 프랑스 왕이 없으니 코델리어는 위로받지 못한다. 연극은 선량함에는 눈 감아버리고 "인간이란 얼마만큼 더 나쁠 수 있는가"[각주:4]에만 집중하여 결국에는 "인간은 얼마만큼 더 절망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를 위해 인물들의 이미지도 정돈됐다. 특히 동물적이고 거친 저음을 구사하는 거너릴과 리건의 창조는 흥미롭다. "원래 본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시잖아." 대사 후 두 인물이 허리를 낮추고 전형적인 악인의 음성으로 낄낄거린다. 바로 이런 장치들 덕분에 그녀들의 늙은 아비와 우리 모두는 인간의 비참함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

 

3. 당신은 광인의 눈으로 본다.

 

그런데 인간의 비극성을 극한까지 사고해보기 위한 실험실로 정신병원이 적역이라면, 이번 무대는 그 설정이 다소 소극적으로 구현됐다는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은 환상을 전면에 배치하고 병원의 복도를 무대 가장 깊숙이 숨겨놓았다. 스즈키 연출의 또 다른 한일합작연극인 「엘렉트라」(2008)를 비교해보자. 대부분의 배역이 정신병자로 설정되어 휠체어를 탔던 것만 떠올려 봐도, 이런 선회는 분명 특기할만한 사항이 아닌가. 분명한 것은 연극의 초점이 광인 자체에서 비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연출이 그동안 해오던 작업에 한마디를 덧붙인 것이라 해석해보면 어떨까. 그 비극들이 광인의 것이었다면, 결국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 역시 광인일 수 있다는 사실. 영화의 프레임이 관객을 특정 시각 위에 얹어놓듯, 이 정신병원-환상 구조의 연극은 관객을 특정 위치에 앉혀놓는다. 관객은 봄의 행위로 인해 광인의 자리에 앉는다. 세계가 모두 병원이라던 연출의 선언은 더욱 적극적으로 읽혀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제 정신병원은 무대 위가 아닌 객석을 포괄하는 현실 세계 위에 세워진다.[각주:5]

 

4. 건강한 염세주의자의 세계, 리어

 

그리스 비극을 아껴온 연출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이런 구조가 그리스 비극의 시원적 형태와 유사하다는 사실이 우연만은 아닐 듯하다. 술 취한 반인半人의 목소리로 비극적 서사를 듣는 것, 나아가 그 위치에 동화되는 것이 ‘비극의 탄생’이 아니었던가.[각주:6] 이러한 유비는 어떻게 이런 지독한 비극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실마리를 준다. 니체는 비극이 “어쩌면 넘쳐흐르는 건강으로부터 유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세계의 잔혹함을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은 자연히 생에 대해 무기력해질 위험에 처해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런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건강함을 잃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무엇인가 삶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것은 바로 연극일 것이다.[각주:7]

 

즉, 인간의 극한적 악함을 묻는 이 연극 자체는 노老연출가의 강인함과 낙천성의 방증이다. 설령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던 현자 실레노스의 말을 인정할지라도, 연출은 세계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세상이 정신병원이어서 병을 치료해줄 의사 같은 건 애초부터 없다하더라도, 우리는 환자인 채로라도 끝까지 살아봐야 되는 것 아닌가. 이제, 「리어왕」과 『비극의 탄생』 속 어떤 말들은 연출의 안팎을 보여주는 한 쌍의 대사로 읽혀, 외따로 있을 때보다 주고받는 것이 더 좋을 것만 같다. L: 왜 우느냐고? 바보들만 득실거리는 이 거대한 무대에 떠밀려 나온 게 슬퍼서 울지. N: 그러나, 건강한 염세주의자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면, 나의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웃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네.

 

 

  1. “…I was many years ago so shocked by Cordelia’s death, that I know not whether I ever endured to read again the last scenes of the play…”, Samuel Johnson, 「Preface to Shakespeare」, 1765 [본문으로]
  2. “Lear is essentially impossible to be represented on a stage.”, Charles Lamb(Lynne Bradley, 『Adapting King Lear for the Stage』, 2010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연출의 지난 공연은 아래 기사 및 글 참고 * 명인서, 「스즈키 타다시(鈴木忠志)와 희랍 비극의 수용양상」, 『한국연극학 제21호』, 2003 * 하경봉, 「일본 셰익스피어 공연사 연구」, 중앙대, 2003 * 정상영, 「한 무대, 다른 언어 스즈키판 ‘엘렉트라’」, 『한겨레』, 2008.09.30 [본문으로]
  4. 스즈키 타다시, 관객과의 대화 중, 2013.10.9 [본문으로]
  5. 그런 이유로, 연출은 ‘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설령 정신병자끼리라도 통할만한) 몸동작과 호흡, 에너지의 교류에 맞춰있다. 심지어 대부분의 연극에서 그는 다국多國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말의 내용보다는 뱉어내는 순간의 질감을 중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 연극도 한국어와 일본어를 반씩 섞었지만, 많은 공연이 외국어로 진행되는 국제공연예술제의 특성상, 스즈키 연출 특유의 타국어에서 오는 이질감은 희석되어버렸다. [본문으로]
  6. 본래 비극은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불렀던 합창단의 노래인 디티람보스에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 합창단은 주신의 종자인 반인반수의 괴물 사티로스였는데, 제전의 황홀경 속에서 대중은 스스로를 사티로스로 보고 다시 사티로스의 눈으로 디오니소스의 고통, 즉 비극을 본다. 이러한 이중의 환영을 통해서 연극은 성립된다. [본문으로]
  7. “그리스인들은 예리한 눈빛으로 세계사라는 것의 무시무시한 파괴 충동과 자연의 잔혹성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의지에 대한 불교적 부정을 동경할 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었다. 이러한 그를 예술이 구원한다. 그리고 예술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하는 것은 생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