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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울음으로 떨어내기조차 아깝게 아름다운, 『두근두근 내 인생』

두근두근내인생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김애란 (창비,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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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책은 술술 넘겨읽는 편인데, 『두근두근 내 인생』을 볼 때면 자꾸만 글이 눈을 잡아챘다. 어려운 길이 아니라, 너무 아름다운 길을 만났을 때 기억에 꾹꾹 담아 누르고 싶어서 걸음을 못 옮기는 그런 마음이었다. 프롤로그부터 (오지 않은 미래와 겪지 못한 과거가 마주본다. p7), 첫 장부터 (바람이라 칭할 때, 네 개의 방위가 아닌 천 개의 풍향을 상상하는 것. … 당신이라 부를 때, 눈 덮인 크레바스처럼 깊이를 은닉한 평편함을 헤아리는 것. p11) 책을 꾹꾹 넘겼다. 서러울만큼* 좋았다.

다행히 글은 더 이상 발을 붙잡지 않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움이 눈에 익어서리라. 『두근두근 내 인생』은 너무 일찍 부모가 돼버린 아이들과 너무 빨리 나이먹어 버린 아이의 이야기다. 인물들은 서툴게 삶을 살아가고, 농익게 생을 생각한다. 웃음이 슬픔과 예쁘게 엮여- 임신에 당황하고, 아이의 병을 발견하고, 함께 아프고, 방송에 출연하고, 친구를 만나고, 소설을 쓰거나 혹은 소설이 되는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 

혹자는 눈물을 쏟게 만든 책이라고 했다. 소설의 여린 부분은 쉬이 넘길 수는 없었다.(“제가 뭘 해드리면 좋을까요?” … “네가 뭘 해야 좋을지 나도 모르지만, 네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좀 알지.” … “미안해하지 않는 거야.” “왜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네.” “흔치 않은 일이니까……” “………”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 “………” “그러니까 너는,” “네, 아빠.” “자라서 꼭 누군가의 슬픔이 되렴.” “………” “그리고 마음이 아플 땐 반드시 아이처럼 울어라.” p50) 페이지의 여백. 그 조용한 여백을 따뜻하게 메우고 있는 슬픔이 보였다. 그 말줄임표들의 작은 틈을 찢고, “자기보다 더 작은 껍질을 찢고 폭죽처럼 터져나오는” 애정 때문에 많이 아팠다. 

그렇지만 이 『두근두근 내 인생』을 슬픔 혹은 아픔**이라 읽을 수는 없었다. (설령 이야기가 너무 착해지더라도) 잃어가는 것보다 채워가는 것이 더 많은 얼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울고 있기엔 저자의 문장은 너무 아름다웠고, 현명했다. 아름다운 것은 날 것보다, 현명함은 어리석음보다 덜 슬펐다.

글에는 장면을 넓게 펼쳐내는 아름다움과 (바람은 함부로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며 시시각각 몸을 바꿔 딴 데로 달아났다. 혹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를 때까지만 그 이름이고자 했다. p194/ 어디선가 아득히 동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 예로부터 톤이 높아 멀리 가는 까닭에, 집에서도 제 어미가 알아듣게끔 만들어진 소리였다. p204/ 나는 말들이 나를 떠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p305/ “아빠?” … “나 좀 무서워요.” … 아버지는 간호사의 만류 따위 아랑곳 않고 나를 힘껏 안았다. 그러곤 깃털처럼 가벼운 자식 앞에서 잠시 휘청댔다. 마치 세상 모든 것 중 병든 아이만큼 무거운 존재는 없다는 듯. 힘에 부쳐 바들바들 손을 떨었다. …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파동안에 머물렀다. p319~p320)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불모와 가사假死의 계절이 코앞이니까, 가을이야말로 추파가 다급해지는 시절이라고…… p196/ 날이 춥다. 히터를 종일 틀어놔도, 세상에 지구의 의지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나봐. p228)이 군데군데 박혀있었다. 

머금고 있던 숨을 쿡쿡 내뱉게 하는 위트와(“그리고 너, 체고 나온 부모보다 더 민감한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아니요.” “체고 잘린 부모야…….” p91/ 그러자 장씨 할아버지는 머리를 감싸안은 채 절망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안 나와…….” p174/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새 소설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글 잘 쓰는 사람이 제일 멋지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p258) 아무러한 말인데 속을 저미는 장면들(“엄마, 이 사람이 그러는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요……사라질 것 같은 사람이래요.” … “아름아.” “네?” “그 책 읽지 마라.” p177/ “너무 좋아서요.” p285/ “만일 하느님이 ‘너한테 자식을 주겠다. 대신 두 가지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 첫째 아프더라도 오래 산다. 둘째 짧게나마 건강한 삶을 누린다.’ 할아버지라면 어떡하시겠어요?” … “아름아.” “네?” “그런 걸 선택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 “………” p297)은 호흡을 균형있게 붙들어줬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다행히) 울지 않았다. 격해진 감정으로 단어를 함부로 넘기지 않는, ‘소설 속 소설’의 착한 독자로 남은 채, 마지막 장. 문장 하나하나가 예쁘게 골라져 있었다. 간간이 나오는 표식이 아니라 아예 징검다리처럼, 가끔은 걸음이 불편할 정도로 가깝기도 한 촘촘한 돌처럼. 나는 그 불편한 걸음이 너무 좋았다. 글이 계속 눈을 붙들었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한 군데도 마킹***을 할 수가 없었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문법은 시 같고, 노래같다. 그 맞춤맞게 자리를 차지한 반복들이 리드미컬하게, 어느 적확한 순간에 불쑥 가슴을 찌르기도 한다. 소설인듯도 싶고 현실인듯도 싶게. 찬찬하게 음미하다 미처 울음으로 떨어내지 못한 벅참은 오래 남는다. 이 책의 자취도 그래서 오래 남을 것 같다.






*나는 마음에 꼭 드는 것을 보면 참 섧다. 살리에르처럼.

**어느 날인가 길게 울었던 책 중 가장 강렬히 남은 것은 두어 권 정도. 『가시고기』와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렇다. 소파에 누워 책을 잃으면서 한 쪽 얼굴이 다 척척해 질때까지 계속 계속 울었던 기억이 난다. 전자는 철이 든 자식과 껍데기만 남은 아빠의 이야기였고, 후자는 어린 것과 멍울로 가득 찬 엄마의 이야기였다. 어느 책이든 누군가를 위해 내어주는 것은 아팠고, 그래서 텅텅 비어져가는 모습은 슬펐다.

***누군가를 따라하고 싶었다. 그 사람들이 하던 대로 생각을 흘러넘기지 않고, 포스트잇을 붙여보며 읽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사진 찍는 것처럼. 마킹은 서툴렀다. 좋은 구절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으면 마치 작가한테 너무 일찍 마음을 뺏겨버린 것 같아서-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을 때 일부러 모른채 하는 것처럼- 그중 좀 덜한 것은 흘러넘겼다. 마음에 내키는 색으로 마음에 내키는 위치에, 그러나 꼭 겹치진 않게. 뭔가 리드미컬해 보이고, ‘두근두근’해보였다. 
결국 나는 태연하려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엔가 ‘씨나리오’, ‘메씨지’, ‘까무룩 잠이든다’같은 문투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