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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Out

편집編輯인가 편집鞭執인가

‘편집鞭執: 채찍을 쥠’이라고. 대학신문사 칠판 한 구석에 써 있는 말이다. 빡센 신문사 생활과 회사처럼 꽉 짜여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한 농담섞인 낙서이건만 이 말의 날카로움을 학보사의 그 아무도 쉬이 넘길 수 없을 것이다.
 
학보의 역사는 편집권 논쟁의 역사였다. 기사의 경중을 가리고, 할말과 하지 않을 말을 고르며, 신문의 방향을 만드는 이 작업은 종종 ‘누가 최종권한을 갖는가’로 학보사 내에서 화두에 올랐다. ‘학생기자’라는 신분 때문이었으리라. 교수가 지도를 해야 할 ‘학생’으로 대할 것인가, 판단력있는 ‘기자’로 대할 것인가에 따라 이들에 대한 태도가 갈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학보는 학교에서 예산을 받고 운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학교와 학생간 논란이 생겼을 때, 교수와 기자간 견해가 갈리기라도 하면 이 분쟁은 더욱 치열해지곤 했다.
 
『대학신문』도 이러한 역사를 밟아왔다. 1981년에는 기사 하나가 문제가 돼 학생기자가 총 사퇴하고 무기정간을 했는가하면, 2004년에는 주간교수와 기자단 마찰로 인쇄가 중지돼 결국에는 기자단이 사비를 털어 무제호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매번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쌓여 현재 학생기자들을 떠받치는 힘이 됐다. 기자단과 교수단이 함께하는 편집회의가 가장 큰 권한을 갖고, 조판의 최종 과정에 편집장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교수와 학생기자, 서로에 대한 건강한 견제는 ‘사실’을 더욱 ‘진실’ 가까이로 밀어낸다.
 
이번 건국대 사안에서 기자들은 조율을 위한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표제를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에서 ‘인상률과 침묵 사이’로 수정한 것이 그렇고, 학생총회의 기사 비중을 조절한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건 너희들의 동의를 구할 일이 아니며 지시이니 명령에 따르라”라는 말 어디에서 진실을 구할 수 있는가. 수많은 논의가 오간 편집회의의 권한이 무시당하고 한 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하달하는 방식 그 어디에서 옳음을 찾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편집編輯인가 편집鞭執인가. ‘사실’이 수면 위에 너절하게 떠돌고 있을 때, 치열하게 이를 주워 섬기고 엮어내어 ‘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기자들의 고민과 논의였다.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단 한 사람의 의사가 그 고민의 시간을 전복시킬 수 없다. 고민과 유리된 편집권은 채찍鞭일 뿐. 기자는 이에 휘둘려 글 쓰는 기계가 아니다.



건대신문 편집권투쟁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