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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Play

이 여름은 충분하게 불쾌했을까, 「2014년 여름」


2014년 4월 24일(목) 오후 8시

소극장 천공의 성

연출 임세륜 극작 하세가와 코지

극단 Da


1. 삶의 무의미에 관한 세 가지 경우


삶에 관한 많은 성찰적 질문들이 “나는 왜 살고 있나”라는 말로 모아진다면, 삶에서 나타난 거개의 곤란한 얼굴들은 해답의 부재에 정면으로 부딪혔을 때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표정은 “사는 게 의미가 없다”고 깨달아버린 자의 것이다. 그런데,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 무대 위의 인물들이 종종 선언하곤 했던 이 말이 여러 다른 결을 지녀왔다는 사실은 흥미로워 보인다. 가령, 안티고네의 경우. 그녀에게 오빠들을 장례 치르지 않고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죽음만이 의미가 있었다.’ 반면 햄릿의 경우는 어떠했나. 그가 사느냐 죽느냐하며 토로한 진실은 숙부의 악행을 처벌할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만큼 ‘죽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삶과 죽음,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불능의 상태에 직면한 존재는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러나 오늘날의 어떤 연극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사실 햄릿보다 더 난감한 입장이 아닐까. 설명하자면 이렇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이 내 존재를 규정하는지, 내가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꿈을 이룰 수 없다는 문제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왜 그걸 하려고 했더라, 같은 긁적거림. 지금까지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삶이 문제였다면, 이제는 살아갈 이유조차 죽을 이유조차 모르겠는 삶이 문제가 된다. 어쩌면 살거나 죽거나 아무려나 상관없다. 개별적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인간은 인구, 취업률, 실업률, 행복지수, 경제지수, 사망률, 자살률에나 기록될 하나의 파편으로 존재할 뿐이다. “죽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이라면, 살고 죽는 이유조차 모르는 이런 애매한 삶에는 겨우 짜증만 남아있다. 연극 「2014년 여름」의 인물들이 바로 그런 계절을 살고 있다. 무대는 짜증나게 더운 여름이다.


2. 여름을 사는 인간들의 증상, 말言 


암전을 가득 채우는 매미소리, 고정된 채 지겹게 내리쬐는 밝은 조명, 단출하여 의외랄 것 하나 없는 지루한 주유소. 그 곳에 두 남자가 있다. 오토바이를 정비하고 있는 종석 옆에서 선배 민철이 시시껄렁한 말을 거는 무료한 상황이다. 이 둘의 대화는 극의 대부분을 이루지만, 그것을 정상적이고 원활한 소통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대략 이런 식이다. “그 영화 몇 번 봤는데요?/ 백 번쯤. 이십 년 동안 봤으니까/ 형이 지금 몇 살인데요?/ 따지지 마. 성의가 중요하단 얘기야.” 대화가 각자의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말은 족족 시비가 된다. “좋겠어요. 메뉴판 보고 먹고 싶은 거 골라먹을 수 있잖아요/ 너 나 짱개집 자식이라고 무시했지/ (…)그런 얘기 안했거든요/ 식당이 맛있으면 장땡이지 비웃을 건 없잖아?” 말이 소통불능이니, 그러한 장면들로 엮어진 극의 서사는 더디고 성기다. 


말에 소통을 위한 의지나 이야기를 엮어내려는 욕심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극의 앞뒤를 열고 닫는 두 번의 긴 독백을 확인해보자. 어떤 말들은 텅 비어있다. 인물은 “다 끝났습니다”라는 말을 던져놓지만, 여기에는 ‘무엇’과 ‘왜’가 전혀 보충되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말들은 맥락에서 벗어날 만큼 세밀하다. 종석의 독백 일부분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마을 뒷산에 설빙이 얼어붙고 여동생과 썰매를 타러 가던 때, 집이 멀어지자 동생은 계속 집에 가자고 보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감추면서 괜히 동생을 윽박지르는 종석.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여자들은 참 좋겠어요, 참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종석은 지금 “나도 울고 싶다”는 감정을 무려 저만큼이나 멀리 돌아 가까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장들은 이야기를 비워낸 대신, 감정의 절박한 드러냄으로 차있다. 이 연극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의 순기능은 오직 여기에 있다.


알 수 없는 삶에 대한 넘쳐나는 불안정한 느낌, 인물들의 말은 그것의 증상이다. 소통불능의 텅 빈 언어는 그 자체로 인물들의 감정을 폭로한다. 그러하니, 빈약한 서사와 단순한 무대, 다분히 일상적인 연기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연극적인’ 부분은 주로 말과 말의 표현방식에 기대있다. (충분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관객에게 전달된 「작품설명」대로 이 연극이 ‘시적’이라면 그것은 단어 선택과 문장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말과 말이 배치된 방식 때문이다. 단편적인 장면들의 맥락 없는 이어짐이라던가, 현학적 문장과 통속적 대화의 두서없는 뒤섞임은 불안과 상실의 시어다. 마찬가지로, 창작자의 의도대로 연극이 ‘미술적’이라면 그것은 시각적인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말이 가져온 이미지 때문이다. 난데없는 화냄과 폭소, 갑작스런 침묵을 통한 대화의 불안정성이 만들어낸 짜증, 권태, 실패의 느낌이 작품의 고유한 색채를 이룬다.


3. 장난이라는 망각제


그러한 말들을 가지고 인물들은 무엇을 하며 여름을 견뎌나고 있는가. 단순한 서사에서나마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부분은 극 후반, 민철의 제안으로 내기를 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주유소 한 가운데 분필로 선을 긋고, 맨 처음 선을 밟는 것이 여자일지 남자일지 내기를 건다. 때마침 근처로 놀러왔던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나서, 선에 몇 발짝씩 가까워지자, 민철은 난동을 부리고, 이어지는 종석과의 몸싸움. 이 소동은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기실 한 뭉치임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종석은 성실하게 일해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을 갖고 있지만 겨우 이딴 내기에 모은 돈을 전부 걸어버리는 인물이며, 가뜩이나 되는대로 사는 민철은 내기 따위에 자신의 몸과 인간관계를 걸어도 상관없다는 인물이다. 정도가 다를지라도, 이 한심한 남자들은 목적을 잃고 삶을 가벼움에 내맡기는 동류의 인간이다. 초면의 사람에게 들이대고, 드럼통과 꽹과리를 두드리고, 가짜 권총을 겨누거나, 오토바이에 대고 자위 동작을 하기. 극 중 단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삶을 ‘장난’으로 산다.


이런 행위는 끝나지 않는 권태로움을 깨보려는 소극적인 시도로 읽힌다. 장난은 민철이 연극 내내 호소한 증세인 더위에 대한 망각제다. 그에겐 이 시시한 장난이 필요하다. 대체 민철의 상태가 어떠하기에. 그것을 일상의 타는 듯한 열기에 사람도 사물도, 나도 세계도 구분이 안 되는 지경이라 표현해보면 어떨까. 꿈꿨던 일이 생각과 다름을 깨달아버린 그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아무것도 새롭지 않아서, 모든 것에 무뎌지고, 결국에는 어떤 것도 감각하지 못하는 일상에의 중독. 상황은 실연 후 감정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무료하게 살고 있는 종석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세계는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 강박적으로 묻지 않으면 금방 사회의 한 조각으로 흡수되어버리는 세계이며, 삶의 진정성이 아슬아슬해서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위태로워진 세계다. 그곳의 두 사람을 보다 보면 연극의 어떤 인상적인 대사를 바꿔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담배 끊어라, 총은 쏴도 된다. 담배 끊어라, 뽕은 해도 된다, 담배 끊어라, 건강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된다.” 예를 들면 이렇게. “사랑 없이 살아라, 미국에는 가도 좋다. 의심 없이 살아라, 섹스는 해도 좋다. 생각 없이 살아라, 그러한 삶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그런데 문제는, 장난이 실제로 해소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인물들의 행위는 단지 망각제일 뿐이다. 연극이 주는 찝찝함은 무대 위에 곪아진 현상만 놓여 있을 뿐, 공연 내내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온다. 관객들은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인물들의 장난 속에서 어리둥절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말과 서사, 이러한 인물들과 상황을 가지고서 극은 ‘유쾌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일상에 불편한 위화감을 주는 작업, 달리 이 연극을 어떻게 읽을 수 있겠는가. 


4. “전 알고 싶은 거예요, 그냥 그것뿐이거든요”


본래 극단 Da는 베트남 전쟁(「사이공의 흰 옷」)부터 왕따 문제(「어른의 시간」), 가장 근작으로는 5·18민주화운동(「아버지와 살면」)까지 무게감 있는 사건에 천착해 온 집단이다. 그런 극단이 선택한 희곡이 젊은이들의 상실감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사실로부터, 그들이 오늘날의 이 상실감을 꽤나 혹독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해도 괜찮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연극은 표현고자 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주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여름은 과연 충분하게 불쾌했을까. 관객들은 말의 어긋남이나 Mr.리와 같은 캐릭터를 통해 적잖게 웃음을 터뜨린다. 이 웃음이 90여분의 시간동안 여름의 지리멸렬함을 견뎌내는 데는 용이했겠지만, 연극 자체의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전달하는 데 유익했을 것인가는 의심해 볼 일이다.


어쨌든 연극은, 오늘날 이런 유형의 인물들을 대면하는 것이 매력적이거나 유의미한 일인가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삶의 지독한 무의미에 맞닥뜨린 인물을 집요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혹은 묘사하는데 ‘그쳤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감상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든 인간들에게 삶의 의미를 기어이 쥐어주는 것은 애초에 불가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그것은 연극이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에서 이 무의미를 떨칠만한 단서를 찾아 언급해 두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연극에는 한 소녀가 등장한다. 매뉴얼대로 하는 것이 싫어서,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은 더욱 싫어서, 패스트푸드점을 관두고 공부를 시작하려는 소녀는, 극에서 드물게 무언가를 하려는 태도를 보여 흥미롭다. 다음은 길을 물으러 주유소에 들린 소녀와 종석의 대화다.


종석: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소녀: 네? 

종석: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한 사람과 서로를 이해했다는 착각을 느끼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리죠. 

소녀: 믿지 못하세요? 

종석: 예? 

소녀: 당신 이외에도 누군가가 살아있다는 것을. (…) 저, 이쪽 귀, 잘 못 들어요. 그래서 늘 이렇게 오른쪽 귀를 상대방에게 향하거든요. 그러면 상대는 긴장이 되나 봐요. 자기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줄 알고. 하지만, 전 알고 싶은 거예요. 상대방에 대해. 그냥 그것뿐이거든요.


짧은 대화지만, 소녀가 극에서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믿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쪽만 들리는 귀를 통해서라도, 설령 착각으로 연결되는 것일지라도, 단지 알고 싶다는 태도는 관계를 만들어 낼 것이다. 삶도 이와 같을까. 글의 서두에서, 이 연극의 인물들에게는 살아갈 이유조차 죽을 이유조차 모르겠는 삶이 문제가 된다고 했다. 실현 불가능한 바람을 통해서라도, 설령 몇 번이고 상실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그저 삶의 이유를 찾아보려는 태도 자체가 일단의 존재의 이유가 될 수는 없으려나. 어쩌면 저 대화의 교훈은 그런 것. 저 불쌍한 남자들의 여름도 잠깐의 한 계절로 지나길 바라볼 일이다. 알고 싶어 하는 것, 그냥 그것 뿐으로도.

 

『한국희곡』 54호(2014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