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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좋은 배우가 아니다", 『배우에 관한 역설』

배우에관한역설(문지스펙트럼:세계의고전사상2)
카테고리 소설 > 소설문고/시리즈
지은이 드니 디드로 (문학과지성사,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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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생크가 지적한 것처럼, 미학자와 예술가는 각각 실제적 지식과 미학적 담론에서 서로만큼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예술가의 통찰력과 철학적 결론이 거의 일치하지 않는” 그 우왕좌왕함 덕분인지, ‘예술 작품’이 자신의 이름을 발판삼아 신비적으로 해석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최근 접한 “그냥 조용히 보고 각자 알아서들 생각하라”는 댓글이, 무개념 악플에 대한 다분히 짜증어린 분노였겠지만, 어쩐지 석연찮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각자 판단하라는, 그 담론의 부재 때문에.

찜찜함은, 한번 쯤 다뤄질 법한 치열한 논쟁점이 소위 ‘아카데믹한’ 몇몇 인물들에게만 회자되고 있지 않을까, 에 미칠 때 우려가 된다. 창작자와 수용자 모두 단순해지고 있는 것인가. 대중성이 충실한 자양분이 되는 영화·연극 등의 장르에서는 다양한 담론이 작품으로부터 더욱 유리돼 보인다. 그리고 연기론은 우리가 잃고 있는 그 수많은 담화 주제 중 하나일 것이다. 드니 디드로의 『배우에 관한 역설』은 그런 경직된 수면을 깨뜨리는데 아주 유용하다. 글은 두 인물의 대화형식으로 쓰여 저자의 일관된 생각을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신중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관철시키는 데다, 쉽고, 사례는 풍부하다. 이 유쾌한 저작은 우리가 아주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연기론에 슬슬 금이 가게 만들며, 이내 다양한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아주 오랫동안, “배역에 온전히 빠져있다”는 말은 배우의 인터뷰에서 나오는 가장 만족할 만한 고백이며, 리뷰어의 유일무이한 찬사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했다는 배우 엄기준이 「헤드윅」을 맡았을 때 나는 그의 섬세한 감성이 또 한 번 고통스러울까 염려했고, 언제나 ‘역할 자체’가 되어 버리곤 하는 배우 김명민이 「하얀거탑」중 자신도 모르게 진짜 병원의 수술실로 들어갈 뻔 했다는 일화를 들을 땐 역시, 라며 든든해했다. 배역에서 아직 나오지 못했다거나, 두 개의 역할은 절대 동시에 할 수 없다거나 하는 말은 믿음직한 배우라면 한번 쯤 토로하는 어려움이었다. 그런 식으로 배우는 살인마부터 중세의 왕, 성인까지 두루 자신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신비스러운 직업이 됐다. 이제 디드로가 묻는다. “맡은 역할과 거리가 없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교의”인가.

디드로는 아주 분명하게, 완벽한 계산에서 오는 연기를 긍정한다. 감정에 몰입한 배우가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기본 전제는 ‘연기 혹은 연극은 현실이 아니다’는 것이다. 소위 ‘연극의 약속’이라고 말하듯, 연극은 복잡한 기호다. 이를 유념하면 극도의 열정과 감정을 배제해야 하는 이유가 제법 자명해진다. 관객은 ‘보고 싶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즉, 연기에는 서사를 위해서 혹은 해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수준이 있다. 가녀린 여인의 아름다운 흐느낌이나, 영웅의 장중한 죽음 등 저자가 제시한 사례는 사뭇 고전적이고, 불쾌할 정도로 잔혹하거나 성적인 장면은 언급할 거리도 되지 않거니와 합당한 다른 사례를 들 수도 있겠다. 지극한 비통함을 맞이한 인물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어떠한 표정도 행동도 짓지 못한다면 극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은 소설적이며, 다분히 연극적이지 못하다.

또, 기호로서의 연극 무대에는 기호의 특징 때문에 보다 냉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순간의 현실적 표현보다 내재된 '상징'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장엄하여 비현실적인 아가멤논의 대사를 통해 왜 관객이 감동하는가를 묻는 부분은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 연장선을 그었을 때-브레히트에 더 어울리는 해석일 수도 있지만-상징을 중시하는 태도는 극의 거리두기와 만나는 듯하다. 죽음 자체에 대한 비애가 아닌, 인간 운명의 비극과 같은 이면을 보여주고 싶을 때 분명 배우의 감성적 몰입은 위태로운 구석이 있다.

배우들에게 조금 더 적극적인 시사점을 주는 부분은 일화로 풀어도 좋겠다. 18C 배우 키노-뒤프렌은 코르네유의 「폴리외크트」에서 세베르 역할을 맡았다. 황제의 명으로 박해해야만 하는 기독교인에 대해 호의적 감정을 갖은 그는 친구에게 비밀스럽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배우의 낮은 목소리에 관중이 외친다. “더 크게.” 그는 즉시 화답한다. “여러분이 더 조용해져야 합니다.” 디드로는 이 훌륭한 배우 뒤프렌이 그 순간 세베르였는지를 묻는다. 배우의 무대 장악력, 컨트롤까지 주제를 확장한 것이다. 그는 “마음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매 무대마다 고르지 못하다”며 도대체 비탄에 찬 인물이 다음날 무대에 어떻게 오를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한다. 그가 서술하는 이상적 배우는 인간 본성을 깊게 사유하고, 행동을 치밀하게 모방하여, 상상력으로 인물을 만들고, 기억력에 따라 한결같이 연기한다. 좋은 배우에 대한 디드로의 주장은 굉장히 일관적이어서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데가 있다. 그는 말한다. “숭고한 배우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감성의 절대적인 결여이다.(p32)”

글에서는 유물론적으로 보이는 인간관이 곧잘 발견된다. ‘예술의 마술’을 짚으며 예술을 “일상적인 삶의 수준으로 강등시키”지 말라고 하거나, “자연의 인간은 시인보다 위대하지 않고, 시인은 또한 가장 위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배우보다는 위대하지 않지요”라고 선언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런 틈새로 조금 더 논쟁을 끌어보고 싶은 부분도 있다. 대체로 자연적이거나 일상적인 것의 미, 혹은 진정성의 가능성이 지나치게 배제된 듯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인간이 가장 극심한 고통의 순간에도 인간성,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길 원합니다”라고 했으나, 무대 위에서 '진짜'를 요구하는 경우도 빈번해보인다. 가식적인 삶 속에서, 오히려 흐트러질 정도로 진솔해 보이는 결함이 예술의 방식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두뇌와 감성의 분화는 가능한지-감정을 배제한 중에서 그러한 표정과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가-, TV와 영화, 그리고 연극의 장르적 차이도 추후 짚어볼만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