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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Book

언어생활자가 꿰어낸 절망의 감각, 『숨그네』


숨그네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헤르타 뮐러 (문학동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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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사건이 있을 리 없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는 일상의 반복뿐이다. 감각만이 순간 쌓였다가 이내 잊혀 허물어진다. 흐름을 만드는 것은 문이 열릴 때만이 가능한데, 5년간 막혀있는 수용소에 시퀀스와 내러티브가 넉넉할 리 만무하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는 자연히, 서사를 아낀다.

2차 대전 종전을 즈음한 소련의 수용소를 그린 이 책은, 절망에 빠지게 된, 혹은 절망에서 나오게 된 흐름을 서술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 이로부터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분명 스토리의 절제나, 절망 그 자체의 묘사는 두 작품의 동류항이다. 그러나 『로드』가 '걸음'이라면 『숨그네』는 '정지'고, 그래서 '축적'이다. 화자 레오의 회고는 고통을 지나고 살아가는 것에 초점 맞춰 있지 않다. 그것은 허기의 깊은 골을 상념으로 채우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쌓인 감각과 언어의 그물망은 아주 두텁다.

아무래도 “이보다 더 능란하게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책은 없다”(로키 마운틴 뉴스)는 『로드』에 대한 헌사를 빌려와야겠다. 이 촘촘한 시구詩句들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느껴 본적 없고, 때문에 공감할 수 없는 것마저 사유케 한다. 시체의 옷을 벗기면서도 어떻게 인간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지(「내 빵과 볼빵」), 희망이 다 닳아질 때 어떻게 삶을 받아들일지(「10루블」, 「믿음이 담긴 병과 의심이 담긴 병」 中 “그들이 나를 이곳에 영원히 잡아두더라도 그 역시 내 삶이라고”), 도대체 그 굶주림은 얼마만한지(“공복을 먹고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는 허기가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되고 길들여진 허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를 책을 통해 감각할 수 있다. 특히 허기에 대한 묘사는 아주 집요한데, ‘배고픈 천사’와의 공존은 인간 본능과 존엄 사이의 첨예한 얽힘을 잘 드러낸다.

배고픈 천사가 저울을 보며 말한다.
넌 아직도 내가 원하는 만큼 가볍지 않아, 뭘 그렇게 버텨.
내가 말한다. 넌 날 속여 내 살을 빼앗아갔어. 내 살은 네 것이 되어 버렸어. 하지만 나는 내 살이 아니야.
나는 내 살과는 다른 무엇이야. 난 버틸 거야. 내가 누구든 더는 상관없어. 하지만 내가 무엇인지 너한테는
말 안 할래. 나인 무엇이 네 저울을 속일 거야.(p98, 「배고픈 천사에 대하여」)

헤르타 뮐러, 혹은 레오를 ‘언어생활자’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저자의 섬세함을 닮은 화자에게 언어는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에게 말은 사유의 수납장(「라틴어로 된 비밀」)이며, 위무용 수집품(「화학성분들에 대하여」, 「초승달마돈나」)이다. 그가 즐겨 사용한 뼈와가죽의시간, 한방울넘치는행복, 심장삽, 민콥스키 철사, 하얀 토끼 등 고유어와 그 속에 담긴 이미지들은, 이야기의 연속성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 장편 소설을 언어로 꿰어낸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책은 그만 내려놓는 게 좋겠다. 그러나 서사를 파내고, 언어로 덮어, 감각을 생생하게 뿌리내린 이 책에서 우리는, 하조베(Hasoweh), 그 상처 입은 하얀 토끼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만진다.